금강경 한 구절......아닐 비(非)의 해석과 관련하여
금강경을 읽으며 시종 궁금했던 것은,
부처님 당시 혹은 세후 500년 이후의 결집시기에도,
언어의 수준이란 문화나 문명의 수준에 근거한다는 점일진데,
요즈음의 문명언어로 이해할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었다.
한자 아닐 비(非)의 상형은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있는 형상이다.
(혹은 새가 날개짓으로 떠나는 형상이다.)
'아니다'라는 것은 뜻이 격의된 것으로 보여지고,
종래의 뜻은 떠나다, 여의다, 등지다, 돌아서다 정도일 것이다.
또한 동사(動詞)로 해석해 봄 직하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몸의 형상(身相)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이런 상을 깨닫고, 그 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여래를 깨닫는 것이다.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형상을 잘 보고,
그 필멸의 허망함, 그런 필멸이라는 명사(名詞)로서의 념(念)의 허망함을 깨닫고,
그러한 필멸의 연원을 벗어나서 실천하고 수행하는 동사(動詞)로서의 념(念)을 깨닫는다면,
곧 부처를 보리라는 뜻일진데.
'상이 아님을, 곧 아닌 상을'과 같이 비(非)를 상(相)의 수식어로 본다면
요즈음의 언어로서 이해하는 것이 곤란할 지도 모른다.
비(非)를 '아닌'이 아니라 '등지다', '떠나다', '여의다'에서 더 나아가
'벗어나다', '넘어서다'까지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한 방편이러니.
(흔히 여의다는 한자 離의 번역어로 채택된다. 이때에는 떼어내어 거리를 두게한다는 뜻으로
등지게 되어 거리가 생기게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새의 두 날개가 붙어있고 등진 두사람 역시 붙어 있다.)
그것이 구마라집의 번역 당시의 고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해서, 이런 해석이 실천불교로서 그리고 자비행(보시행)의 불교로서의 해석에 더 맞다는 생각을 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