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막말유신(幕末維新) 이노우에 가쓰오 (3) - 외국상인의 내륙지 침입을 막은 것은 활성화된 지역상인과 에도의 신용시스템이었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6. 2. 6. 18:02

막말유신, 이노우에 가쓰오 저, 이원우 옮김, 일본근대사 시리즈 1, 어문학사

 

제3장 개항과 일본사회

 

- 일본 민중의 모습

 

종래의 혐오와 경계라는 이미지는 현대의 문명개화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서양문명을 따라가고자 하는 의식이 문화 후진의식, 문화 열등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에도 후기의 사람들은 그러한 열등의식과는 무연했다... 그들의 태도는 여유가 있었으며 당당했다. (119쪽)

 

시모다의 혼욕대중탕-페리제독 일본 원정기 삽화

시모다의 혼욕 공중목욕탕을 그린 유명한 하이네의 그림은 ..."...외국인이 들어와도 이 벌거숭이 남녀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라는 하이네의 표현처럼 남녀 불문하고 나체를 별로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는 개방성이 에도 서민문화의 특징이다. (121쪽)

... 에도시대 막부를 반미개라며, 그 아시아적 전제 지배와 신음하는 농민을 기술하는 것이 서양인의 패턴화 된 일본 민중의 모습이었다. (1853년 페리의 내항 이후 1856년 시모다(下田)에 부임한  미국 초대 일본 총영사(Consul General in Japan)) 해리스 ( Townsend Harris)의 관찰도 일본을 철저하게 반미개로 보고 있다. (122쪽)

 

** 이 시점에서 하멜 표류기가 본 조선의 모습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폐쇄적이고 외국인에게 완전히 닫힌 사회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이 자연 이전의 미개라면, 조선은 아시아적 전제주의 하에서의 미개로 그려진다. 

 

"

이 나라에서 평민은 매우 비참하며, 양반들에게 노예처럼 부려진다.

비록 맞거나 죽임을 당하더라도 양반에게 대항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형벌은 매우 가혹하여 매질과 처형을 날마다 볼 수 있다.

여인들은 거의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매우 억제된 생활을 한다.

외국인에게는 완전히 닫혀 있다.

"

 

압제적인 지배,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농민이라는 서양의 보편적인 아시아적 전제론에 대하여 실제 일본 농촌을 본 (초대 영국공사) 올콕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종래 일본의 에도시대사 연구도 서양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아시아적 전제라는  틀에 갇혀있었다. (123쪽)

 

- 소원 訴願

 

민중의 소원 訴願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국소 國訴이다. 면이나 채종 등 자유로운 유통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기내(畿內)가 무대였다. 1823년 (123쪽)... 여러 촌은 1007개 촌이라는 일대 소원운동, 즉, 국소를 조직했다... 군郡 내에서 영주를 달리하는 촌장들은 영주가 다르다는 점과 관계없이 군마다 회합체를 결성하고, 군의 대표자인 '군중총대 郡中總代를 선출했다. 아직 영주별로 구분하지 않으면 대표를 선출할 수도 있었으며, 그러한 지역에서는 영주별로 '총대 촌장'을 선출했다. 

... 주목해야 할 점으로 대참회-소원의 지도부-에 참석하는 '군중총대'와 '총대 촌장'에게는 여러 마을에서 다음과 같은 '의뢰증서'가 제출되었다... 마을 쪽에서 총대들에게 어디까지나 공동책임을 진다는 취지를 문서로 보증한 것이다. (124쪽)... 국소의 소원 취지에 따라, 혹은 소원의 문장 그대로 (막부에서 채택...) 포고했다. (126쪽) 이것은 사실상 촌리가 막부의 정책형성에 참가한 것이었다. 에도 막부지배의 강함은 소송을 엄금하고 농민을 힘으로 압도한 점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원을 접수하고 헌책을 받아들이는 '유연성 있는 지배'에 지속할 수 있었던 비밀이 있었다. (127쪽) 

 

- 무역개시 이후의 일본

 

1859년 6월 요코하마, 나가사키, 그리고 하코다테에서 자유무역이 시작되었다. (128쪽)...일본의 수출 1위 품목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생사로 수출총액의 50%에서 70%를 차지했다. 2위가 차로 10% 전후였다. 일본의 수입품목 1위는 대영제국의 엔진이라고 불렸던 기계로 짠 엷은 목면 '금건목면 金巾木綿', 그리고... 모직물이다. 또 막말 후기에 함선, 총포 등 서양무기도 수입되었는데... 수출입 모두 대영제국 최성기의 영국과 압도적으로 많이 이루어졌고... 최초로 무역을 시작한 시기에 (단기적 현상으로)... 일본의 금과 은 교환비율은 국제 수준에 비교해 보면 극단적으로 저렴했기 (약 1/3 정도 저렴한 값) 때문에 대량의 일본 금화가 국외로 유출했다. 다음 해 막부의 화폐개주에 의하여 금화유출은 중단되었고, 이것은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129쪽)

 

... 일본의 조약에서는 외국인이 거류지 이외에서의 상업적 용무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각지의 생사 판매상이 요코하마로 쇄도하여 일본 내륙침입을 노리는 외국 상인의 기세를 막았다. 

... 인구 1인당 영국면포의 수입액에서도 일본은 중국의 2배 이상으로 무역의 영향은 내륙부까지 고루 미쳤다. 

... 외국상인의 내륙지 침입을 막은 것은 첫째로 활성화되어 있던 일본 각지의 지역상인이며, 둘째로 에도의 발달한 신용 시스템, 셋째로 외국인에게 개항장으로부터 10리 밖으로 유보(遊步)를 금지한 엄격한 조약이었다. (131쪽)

 

(1862년 사쓰마 번사에게 영국상인이 살해된 것-나마무기 사건-...때마침 요코하마에 영국 군함 3척이 입항하고 있어...) 1863년 1월 영국 본국 외무부로부터 나무구기 사건에 대한 훈령이 전해졌다. 쇼군에 대해서는 책임자로서 배상금 40만 달러, 사쓰마번에 10만 달러, 거부했을 경우 막부에게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 사쓰마 번에는 함대가 가고시마로 향한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력 격차를 알고 있는 막부는 영국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지급조건 등에서 완강하게 저항하여 기한을 연기하고 또 연기했다.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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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5월 겨우 배상금 지급교섭이 분할지급으로 정리되었다. 거기에 조정으로부터 전달된 것이 양이 실행의 칙령이었다. ...양이 실행 기일 전날 (5월 9일), 막부는 조정의 제지를 무시하고 배상금 전액을 한 번에 지급하여 요코하마 항구 폐쇄에 관한 외교교섭에 착수할 것을 선언했다 (134쪽)...나마구기 사건 배상금 지급을 알게 된 교토의 고메이 일왕이 격노하여 자필칙서를 막부에 보냈다. "황조신에 대해서 면목이 없고, 가령 황국 일부가 초토화되더라도 개항교역은 절대 바라지 않는다." (135쪽)

 

- 식민지화의 위기에 대하여

 

종래부터 막말 일본의 '식민지화 위기' 정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여 긴 논쟁이 있었다....시기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 1861년 2월 러시아 군함 1척이 대마도에 내항하여 막사등을 건설하고, 항의하는 쓰시마 번에 영구조차(租借)를 요구했다.... 영국공사의 항의도 있어 러시아 군함은 퇴거했다. 

... 사건이 '식민지화 위기' 논쟁에서 반드시 인용되는 것은 일본에 압도적인 영향력이 있었던 영국공사 올콕이 "만일 러시아 함이 쓰시마로부터 퇴거를 거절할 경우 영국이 직접 쓰시마를 점령해야 한다."라고 언명하고, 영국이 일본 점령의 의도를 내보였다고 전전의 일본 문부성 유신사료 편찬회편 <유신사>에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136쪽)

 

최강해군국 영국은 일본 주변 해역에서의 러시아와 세력 균형, 대륙국가 중국을 향한 교두보로서의 해양국가 일본의 지리적 위치, 일본의 수준높은 국가 통합과 세 개의 조약의 항(港) 방위의 곤란함, 그리고 순조로운 무역 추이 등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이것들이 영국의 일본영토 식민지화라고 하는 현실적 위기를 상당히 작게 만들고 있었다. (137쪽)

 

...야마토 양이친정까지 이른 교토의 존왕양이 운동은... 파괴폭동으로 종말을 고했다. 향토를 방위하는 민중운동은 식민지화 위기가 현실로 육박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태평천국 전투나 조선의 갑오농민전쟁과 같이 중간층, 하급무사와 호농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사회의 대립을 초월하여 큰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140쪽) 파약양이 破約攘夷에 의한 전쟁 위기는 있었지만, 위기는 일본이 자초한 것이었다.... 단, 이 무렵의 지역활성화가 오로지 존왕양이 운동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 민중에게는 멀리 요코하마의 생사 무역 참가를 목표로 하여 개국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서서히 정착시키고 외국 상인의 침입을 단념시켜, 일본의 민족적 독립의 광대한 기반을 만들고, 일본의 식민지화 위기를 막았던 것이다. (141쪽)

 

... 당시, '통상이 날로 성행하여 물가가 날마다 올라 국력이 점점 피폐 (조슈 번 상서)'하다며... 일반적인 배외감정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서양으로부터의 군사침략 동향은 현실상황으로서는 시모노세키에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로 일본에서 '침략위기'를 조성하는 수법을 취했다. 한마디로 만들어진 위기였다. (146쪽)... 현실이 임박하지 않은 대외적 위기를 과대하기 강조하는 수법은 국내의 무력 전제지배의 강화로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다. 또, 평가되는 것은 무력을 갖춘 침략자와의 전투가 일어났을 경우이다.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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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부-조슈 정벌 (1864) : 조슈번의 급진 세력이 천황의 권위를 빌려 막부를 타도하려다 실패한 '금문의 변(교토에서의 무력 충돌)'이 계기가 되어, 막부는 조슈번을 '조적(조정의 적)'으로 선포하고 35개 번의 군대를 동원해 압박, 당시 조슈번은 세력이 약해진 상태였기에 싸우지 않고 항복했으며, 사건의 책임자인 가신 3명이 할복하고 막부에 굴복하는 보수파가 정권을 잡으며 일단락

 

막부-조슈 전쟁이 있기 직전인 1865년 5월, 개세약서 改稅誓約이 체결되었다. 거의 20%에 가까운 고율종가세 從價稅였던 수입관세가 물가상승을 반영하지 않는 5%의 저율종량세 從量稅로 바뀌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관세에 대해서 텐진 조약을 맺은 중국과 같은 불리한 조건을 인정하게 된다.... 19세기 전반 미합중국의 관세수입은 세입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관세야 말로 근대국가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153쪽)

 

- 삿초 동맹(薩長同盟, 1866)

 

1866년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きど たかよし) — 長州藩 )가 싸스마번에 초대되어 남몰래 교토 후시미의 사쓰마 번저를 찾아가 사이고 다카모리( 西郷隆盛(さいごう たかもり) — 薩摩藩)  등 (153쪽) 과 회견했다. 서로 전투한 사이라 쉽게 화해할 수 없었지만,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さかもと りょうま)가 중간에서 주선하여 삿초연합밀약이 합의되었다. ... 현재 형세는 도무지 사쓰마 번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このままでは西洋列強に対抗できない」 앞으로는 반드시 전쟁이 될 것이다. ...(깃카와 쓰네마사 주유기)...조정의 결정을 둘러싸고 막부의 우세함 때문에 힘을 쓸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쓰마 번이 사실은 막부와 조슈 번과의 일전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이다.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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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조슈 정벌 (1866년): 조슈번 내부에서 다카스기 신사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반막부 세력이 권력을 잡으며 이들은 서양식 무기를 도입하며 전쟁을 준비. 삿초 동맹: 원수지간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비밀 동맹을 맺게되며, 사쓰마번은 막부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조슈에 무기를 지원. 막부는 대군을 보냈지만, 서양식 전술과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조슈 군의 유격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고, 그 결과 전쟁 도중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면서 막부는 퇴각할 명분을 찾게 됩니다. 이 패배로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사실상 막부의 멸망이 예견되는 상황으로 전개.

 

기병대 등 무사와 서민 혼성의 유지대(有志隊)의 제대는 엄격하게 통제된 상비군으로, 긴급 시에 동원되는 민병이 아니었다. (157쪽)

... 한편 제대의 병사가 상의 겉옷, 군복, 속옷 이외는 금지당한 것은 보졸이라도 작용하던 다소의 보호구(몸통 갑옷 등) 조차 착용하지 않은 알몸 상태의 '쓰고 버리는' 근대 보병의 등장을 의미한다. 제대는 이런 내혹한 조직 속에 활력 있는 농민을 편입했던 것이다. (158쪽)

... 조슈번의 개명파 유사는 서양의 최신무기를 수입하고, 서양의 근대 보병전법서를 도입하여... 정예 상비군을 만들었다. 구식 무기를 손에 들고 수많은 인민이 열강에 항전하는 민병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후발국에서 만들어지는 사회로부터 돌출한 근대군인 것이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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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諸隊, 쇼타이): 에도 시대의 군대는 오직 신분이 있는 무사(사무라이)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과 막부와의 갈등 속에서 조슈번에서 기존 무사 조직의 무능함을 깨닫고 새로운 형태의 군대를 조직.

  • 기병대(奇兵隊, 키헤이타이): 제대의 효시이자 가장 대표적인 부대. '기습하는 부대'라는 뜻이 아니라, 정규군(진병)과 대비되는 '유격대'라는 의미
  • 신분 타파: 가장 혁명적이었던 점은 신분에 상관없이 실력만 있다면 농민, 상인, 직공 등 누구든 입대할 수 있었다는 것

기병대는 신분해방을 요구하는 피차별 부락민과 억압으로부터 달아나는 농민을 해방하는 조직체는 아니었다. 민중을 끌어당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난한 민중이 병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군대가 민중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도 서양 신무기를 도입한 후발국의 강력한 정예 상비군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 병사가 되어서 실력으로 출세할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군대가 민중에게 매우 억압적인 존재이다. (이토 치히로, <불타는 중남미>) (161쪽)

 

 **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박정희의 궤적이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하여 일본 막말의 제대를 조선의 의병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한 사회를 미래로 추동하는 힘은 어떻게 조직되고, 현실유지를 목적으로 한 힘은 어떻게 한계를 보이는지도. 

 

한편, 고메이 일왕의 신임을 얻은 신 쇼군 요시노부는 막정개혁에 정력적으로 착수한다. 프랑스 공사 로슈의 조언도 수용하여 막부 제도에 국내사무, 회계, 외국사무, 해군, 육군으로 행정의 분과를 마련하고, 형식상으로는 근대국가의 전문 부국제를 채용했다. (162쪽)... 요시노부는 프랑스의 툴롱 군항을 모델로 한 요코스카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고, 모든 하타모토를 서양식 총진 편성으로 하는 목표로 삼고, 또한 영국 상회에 암스트롱 포 수십 문을 발주했다....

 

이때, 완강한 양이주의자이며, 막부 말기 정국에 큰 영향을 끼친 고메이 일왕이 1866년 12월에 서른여섯의 나이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163쪽)... 고메이 일와의 죽음으로 요시노부는 강력한 후원자를 잃었으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 4개국의 공사를 알현하고... 효고 개항을 포함하는 조약을 준수한다고 명확히 약속했다. (164쪽)

... 요시노부는... 1867년 5월 말 (효고 개항 승인 문제와 조슈번 사면문제에 대한 분규에 대해...) 섭가와 친왕 등 상급귀족 전체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사쓰마 번의 패배였다.... 삿초연합밀약에서는 주목해야 할 제5조에서는 (169쪽) 막부가 조정을 옹위해서 정의를 막고 주선. 진력하는 길이 차단되었을 때에는 마침내 결전에 이른다고 합의되어 있었다... 말에 의한 주선. 진력의 길이 사라진 사쓰마번은 막부와 무력으로 싸우는 (삿초연합밀약이 마침내 결전에 이른다) 것도 불사하는 조정의 대변혁을 계획했다.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