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동 3

1973년

1973년 끝도 없이 오르고 싶은 전봇대에 저녁 까마귀 높이 따라 오르고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는 으레 수염 난 포수가 핏기 묻은 참새를 팔았다. 한 차례 퉁퉁 기적 소리 울려 기억의 흔적 쓸어내며 기차가 지나가버리면, 팽나무 그늘이 넓은 공장의 공터에 찬 바람 하고만 놀 수 있었다. 오후의 햇빛 아래 배고픔은 부서져 나간 붉은 벽돌담으로 낡아있었고, 코쟁이 미군들이 주는 소빵을 닮은 기와지붕 국민학교 운동장엔 아이들이 종일토록 밀가루에 취해 떠날 줄을 몰랐다. 마을 초입의 늙은 은행이 베어져 그늘 아래 장기 두던 할배들도 사라지고 새마을 노래가 우리들의 진따기 고함을 대신하였다. 이미 「오징어 달가지」 놀이에서 잡아 놓지 않은 무엇이든 가서 빼앗아 와야 한다는 걸 배웠고, 등을 태우는 오후의 땅따먹기에..

우동 한 대접

우동 한 대접 참으로 귀한 음식이었던 그것이 이제는 흔하디 흔한 음식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새록새록 추억 속으로 떠난다. 입학식이 있던 날의 외식이거나 졸업식날의 점심이거나 하던 짜장면과 함께 가락 국수 한 대접에 대한 추억 속으로. 무시무시한 파출소와 무기고 철조망을 뒤로하고 철길 옆에 경화반점이 있었다. 반점이라는 게 여관의 뜻도 함께 하나, 그 집이 여인숙도 같이 하였던가는 기억에 없다. 다만, 옆집에 여인숙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던, 반점이라니, 이 얼마나 사치스런 집이름인가? 뗏놈이라고 불렸던 그집 주방장은 (사실은 화교가 아니라는 소문이 많았다) 우동 하나는 기가 차게 말았는데 속풀이 술국으로 아버님이 자주 드셨다. 하여, 양푼 주전자를 들고 철길을 걸어..

개골창 옆 만화방

정확하게 그 만화방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 같은 광복절 때문일 것이다. 만화방 치고는 이름도 거창하였는데, "무궁화서림" 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사실은 세들어 살던 그 집)은 철둑 근방이었거니와, 경화 시장과 쇠전을 끼고 있었다. 기차가 닿는 곳에 장이 서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겠고,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장을 따라 흘렀던 개골창에 대한 추억 한 자락이다. 개골창을 가로 질러 널빈지로 바닥을 대고, 가설로 판자집을 올려 가게들이 몇몇 서있곤 하였는데, 그 하나가 무궁화 서림이었다. 예전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무궁화 지우개, 무궁화 연필, 무궁화 공책, 하다못해 무궁화 비누까지 온통 무궁화 무궁화 꽃이 만발하였지만, 일개 만화방에 무궁화 서림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양철간판에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