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막말유신(幕末維新) 이노우에 가쓰오 (5) - 내란을 갈망하는 마음을 외부로 향하게 하여 나라를 흥하게 하려는 원략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6. 2. 7. 16:19

막말유신, 이노우에 가쓰오 저, 이원우 옮김, 일본근대사 시리즈 1, 어문학사

 

제5장 '탈 아시아'로의 길

 

- 이와쿠라 사절단

 

1871년 11월 12일 46명의 유학생들을 더하여 총원 107명의 ( 특명전권대사 이와쿠라 토모미를 단장으로 한 정부 공식 해외시찰단 岩倉具視遣外使節団)이와쿠라 사절단이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약 1년 10개월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독일->러시아 등 12개국을 방문) ....  서양과 체결한 조약의 개정기한인 1872년 5월로 다가오고 있었다.사절단의 파견 사유서는 조약이 불평등한 것은 일본이 '동양 (218쪽) 국가 체제의 한, 정속(政俗)'이기 때문이라며 개화의 필요성을 기술하고 있다. 폐번치현 이후에도 불평등을 없애는 일대 기회는 커녕, 서양은 청국의 텐진조약 수준의 권익을 획득할 호기로 여기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곤란한 일을 겪을 시련에 직면해 있으니, 그것을 반전시켜 '성업을 일으킬 기회'로 만들기 위해 서양을 순회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급무'로 여겨진 것은 법률, 재정, 외교라는 절실했던 3개 항목이며, 일본에 채용하기 위해 실제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다. (219쪽)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사진: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조슈 번 출신 야마구치 마스카 (山口尚芳): 외무소승(外務少丞)으로서 사절단의 부사(副使) 역할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具視): 사진 중앙 사절단의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당시 공부대보(工部大輔)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사쓰마 번 출신

 

 

**1881년의 조선에서 일본에 보낸 조사 시찰단 朝士視察團 은 고위 관료 12명과 수행원 27명, 일본인 통역 2명을 포함한 12명의 통역관 및 하인 13명으로 구성된 총 64명으로 1881년 4월 11일부터 윤7월 1일까지 약 4개월 동안 메이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낱낱이 살펴보았다고 되어 있다. 일본인 통역2명을 포함한 12명의 통역관과 하인 13명에서 이와쿠라 사절단과의 차이가 확연해진다.

(조사시찰단은 조사 12명, 조사 한 명당 수행원 2-3명, 통역 1명, 하인 1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이와쿠라 사절단의 하인 고용인의 규모는 50명 수준이었다. 고위 관료가 아니라 실무 엘리트 관료의 숫자가 40명 수준이었다.

 

폐번으로부터 20일 후, 히로시마 현하의 10만여 명이 봉기한 부이치 소동에서 시작...(220쪽)

폭동세력의 요구는 연공 年貢 -곡물로 내던 봉건적 세금-증징 반대, 절과 신사에 관한 종교정책 반대, 해방령 반대 등 다양했다. ...메이지 정부는 폭동에 대해서 엄벌로 대처했다. (221쪽)

 

...에도시대 후기에 피차별 부락민의 신분해방을 추구하는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었고, 해방령은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천민폐지령이 발령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지조개정 (地租改正, 1873 - 곡물로 내던 봉건적 세금을 → 돈으로 내는 근대 토지세로 바꾼 것 )관련 법안의 발령이었다...그때까지 에타( 穢多)-부정을 다루는 사람-와 히닌( 非人)-신분에서 떨어진 사람-은 '사회 밖'의 존재로 여겨지고, 그 택지도 '토지 외의 토지'였다. 하급 형리역과 우마의 시체처리를 담당하는 대신에게 연공 年貢 이 면제됐다. 소위 말하는 무조지(無租地)이며, 에타와 히닌의 거주지도 특정한 장소로 제한되었다. 한편, 메이지 정부는 모든 토지에 획일적으로 지권을 발행하여 세금을 거두기 위해 신사와 절의 토지나 무사의 토지 등을 포함한 무조지의 자유매매를 허가하고, 조세도 부담시켰다. 

...1871년 8월 모든 무조지의 폐지가 포고되었다....결룩 무조지 폐지 9일 후에 천민신분 자체에 대한 폐지령이 발포되었다. (222쪽)

...피차별 부락민은 피혁 제조 등의 차별과 결부된 독점권도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그 권리가 몰수되어 피차별 부락민의 다수가 생활기반을 파괴당했는데, 정부는 그것을 방치했다. 

 

...'사민'은 '자유'의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난을 막기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고 국민개병을 선언했다. (223쪽)...상비병과 후비병 병사 이외의 17세부터 40세 남자 모두가 국민군에 편성되었다. 이것이 유럽시찰에서 돌아온 야마가타 아리토모 병부경이 프러시아를 모방한 국민 개병제이다. 

...학교제도의 제정도 급진적...조사 개시후 불과 8개월만에 시행...대.중.소의 학구로 나누고 대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를 설치했다. 전국에 5만 3,760교의 초등학교를 일시에 설립하는 구상이었다. 프랑스의 학제를 모방하여 '마을에 불학하는 집이 없고, 집에 불학하는 사람을 없게한다'는 획일적인 국민개학제 구상으로, 개인의 공리주의를 끌어내자는 취지였다. ...막부말기의 서당 개설 수는 3만에서 4만으로 추정...(224쪽)

 

'개화 러시'가 일어났다. 영국식을 도입한 우편제도는 1871년에 시작되고, 미국의 내셔널 은행을 도입한 국립은행 조례가 1872년에 발족, 태음력인 12월 13일을 정월 초하루로 하는 서양의 태양력이 1873년에 도입되었다. (225쪽)

 

1873년은 메이지 초년 폭동의 하나의 정점이 되었다....혈세폭동...죽창폭동...징병령 반대 폭동...해방령 반대폭동으로 계속되었다. (226쪽)...에도시대 농민은 연공 年貢 은 바치고 있었지만, 군사적인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메이지 정부는 연공 年貢 을 줄이지 않고 게다가 서민을 병사로 만들었다. 인민의 부담은 메이지 정부에 의해서 훨씬 가중되었다. (227쪽)

 

- 동북아시아 속에서

 

동아시아의 3국 연계론-청국과 조선 일본은 동문同文의 나라이며 옛정을 살려 3국이 정립 鼎立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었지만, 유신정부에서 힘을 얻은 것은 기도 다카요시가 같은 해 1869년에 주장한 강경론이다.  외교문서를 접수하지 않는 것은 무례한 행동으로 병력으로 밀어붙여 조선의 부산항을 열게 해야 한다는 무력조선침략론, 즉 정한론이 그것이다. 판적봉환 이후인 1870년 5월 외무부는 조선외교를 담당해 온 쓰시만 종가(宗家)의 외교권을 몰수했다. ...정한론을 주장하더라도 폐번치현 이전의 유신 정부에 대외전쟁을 준비할 재원은 없었다. (230쪽)

 

판적봉환의 다음해인 1870년, 유신정부는 조선과의 외교를 우위에서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의 종주국인 청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동조약을 맺는 예비교섭을 준비했다...1871년 7월 청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다. 영토보전과 상호원조를 규정하고, 서양으로부터 강요당한 영사재판권과 협정관세를 서로가 인정하는 변칙적인 대등조약이었다. (233쪽)

 

1872년 부산의 왜관 倭館(235쪽)에서는 외무부 관리와 조선관리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왜관은 조선이 건립하고 체재비도 조선이 부담하여 나가사키의 데지마 (出島) 이상으로 엄격한 규제가 시행되고 있던 장소였다. 외교부 관리는 그 왜관을 허가없이 뛰쳐나와서 교섭을 요구하고 (왜관난출倭館欄出), 이어서 쓰시마 번사를 철수시키고 왜관을 점거했다. 왜관에는 조선 시장을 엿보는 밀무역 일본상인이 드나들고 있었는데, 조선은 필요한 물품의 공급을 끊고 밀무역을 금지했다. 이렇게 에도시대에 유지된 조일간의 교린 외교는 종말을 고했다. (236쪽)

 

1873년 이와쿠리 사절단 멤버가 귀국했다...삿초그룹은 유수정부 (留守政府, るすせいふ)-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일본에 남아 국정을 운영하던 임시 지도부-의 즉시해외파병론에 대하여 ...'내치우선파'가 되었다. 단 사절단파는 대국주의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서양문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가능하며,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호기라는 점에서 한층 더 강한 확신을 한 것이었다. 

 

1873년 10월의 각의에서 (유수정부의 대표지도자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파견이 재확인되어 사절단파는 일단 패배했다.

...이해 세계공황이 발생하여 세계사적으로 긴 대불황기 (238쪽)-제국주의 단계로의 입구-에 들어간다. 일본의 생산수출도 가격이 폭락하여 크게 저하되었다. (239쪽)...

...조선에서는 일본에서 오쿠고 정권이 성립했을 무렵, 양이강경파였던 대원군이 고종일족에 의해 퇴진당하여 대일정책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240쪽)

 

메이지 유신의 핵심 세력이었던 조슈 번(長州藩) 출신 인물들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조슈 번의 지도자로서 사쓰마 번과의 동맹(삿초 동맹)을 이끌어 막부 타도의 기반을 구축하고 실질적인 메이지 정부의 설계자로서, 판적봉환(영지 반납)과 폐번치현(중앙 집권화)을 주도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기초가 된 '5개조 서문' 초안 작성을 총괄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사진 뒷줄 가장 왼쪽):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초대통감을 지낸 인물. 안중근장군에 의해 사살.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사진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 앉아있는 인물): 청일 러일 전쟁을 주도한 인물, 징병제 실시

 

- 동아시아 침략의 제1단계

 

정한론을 직전에서 억제한 오쿠보와 오쿠마가 대만 출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미국인 외교고문 르 장드르도 일본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 중의 보호자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치켜 (241쪽) 세웠다. ...영국공사와 미국의 신 공사등도 일본이 청국과 대립하는 것은 환ㅇ쳥하겠지만, 중국.대만의 무역이 방해받는 것을 염려하여 출병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청국은 양무파에 의한 서양식 군제개혁이 진척되고 있지 않았으며 일본과 전쟁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도 재정이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인정을 하고 있었다. (242쪽)

...영국의 압력으로 청국이 배상금 50만냥을 지급하고 일본의 대만 출병을 국민을 보호하는 의거라고 승인하는 것으로 겨우 타결했다. ...기회를 보아 중일 양국을 중재한 주청 영국 공사 웨드는..."일본의 권위를 중국 정부에 떨쳤다."...라며 치켜세우고 조선에 손을 댈 때에는 원조하겠다고 자극했다.'대불황기'의 입구에 있던 영국은 유럽, 중근동, 중아아시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대립을 하고 있었으며, 러시아가 한반도를 제압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영국은 지금이야말로 동아시아 소강국 일본을 자기의 세계전략에 포함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243쪽)

...대만에 출병하는 군사수송을 의뢰할 예정이었던 미국이 일본의 출병을 지지하지 않고 국외 중립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정부는 13척의 기선을 사들여 미쓰비시 상회에 위탁했다. 미쓰비시 상회는 정상(政商)으로서 대만출병 직후에 상해항로에 진출한다. 관민일체의 침출 浸出이었다. 우쿠라구미(大倉組) 상회도 대만출병으로 육군의 어용상인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244쪽)

 

...한편 대만 출병 후, ...러시아 외교를 안정시킨 메이지 정부(245쪽)의 외무부 관리는 조선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로 선회하여, 기선으로 부산에 입항했다....그리하여 군함 운양호 등이 부산에 잇달아 입합, 외무부 관리가 투입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해운보호정책을 결정하고 상해에 항로를 연장한 미쓰비시 증기선 회사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조선무역에서도 쓰시마에 한정되어 있던 무역을 개방하는 것을 획책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9월 20일 강화도에서 염하(鹽河)로 침입한 일본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포대를 군사적으로 도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운양호는 '측량 및 제사 검수, 조선국 관리 면회, 만사 심문'을 위하여 무장단정으로 조선진영이 있는 제3포대까지 염하를 거슬러 올라가, 더욱 안쪽(서울 방면)으로 들어가기 위해 완전 무단으로 (246쪽) 포대앞을 통과했을 때 포격당해 교전이 시작되었다. 

...사건에는 외무부도 관여하고 있었고 목적은 명확했다. 서양이 후발국(반미개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과 맺고, 조선을 개국시키는 일이었다. 에도시대에는 이웃 나라 조선과 대등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조선을 일본의 후발국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247쪽)

 

...당시는 대불황이 계속되고 있어 국가재정은 "파산상태에 이르려 한다. (토쿄니치니치신문)"라고 할 정도로 평가되어 전비가 부족했다. 정부가 ...내린 훈령은 '화약을 체결하는 것을 주로 한다'고 명기하고 있으며 (248쪽)

...1876년 2월에 조일수교조규가 체결되었다. ...조선을 자주국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청의 종주권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용은 철저한 불평등 조약이며...일본의 항해자에게 해안을 수시로 자유측량을 하는 것과 나아가 일본의 영사재판권을 인정했다. ...일본 상인은 영국 면포를 중계수출하고, 조선에서 주로 미곡을 수입하여 청국의 주선무역 총량을 능가했다. (249쪽)

 

- 지조개정

 

에도시대에도 토지 매매는 인정되고 토지가격도 성립되어 있었다. 단, 토지소유는 촌락 공동체에 귀속되는 곳이 많았다. 근대 일본과 같이 엄격하게 배타적인 근대적 토지사유권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251쪽)

...그러나 토지를 대규모로 집적한 대호농상은 폭동 등에 의해 저당지 환수나 토지 무상환수를 요구당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농민봉기로 공격당할 정도의 대호농상, 대지주, 즉 호장급의 대부분은 지권발행이라는 배타적 사적 토지소유권을 환영했다. 

유수정부는 다음해 1873년 여름 지조개정조례를 발표했다. 토지를 조사하고 토지가격의 3% 정률지조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252쪽)...관세수입은 안세이(安政) 조약에서는 20%였는데, 개세약서에서 5%로 되었기 때문에 ...지조에 의존하는 체제가 되고, 나아가서는 농민의 세 부담이 무거워졌다....소수의 대지죽 토지를 집적했다. 또 전답과 세트로 된 촌락 공유지의 세금이 없었던 산야에 지권이 발행되어 대부분이 국유, 왕실 소유로 되었다. (2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