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4. 8. 1. 05:22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가을 저녁이 아름다운 절, 그래서 '미황사'일지는 오직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달마산 미황사를 두고 김태정 시인이 길어올린 싯구는 녹녹치 않은 세월과 시절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하기야 나 역시도 하루 두 세번 지나는 완행 버스를 타고 미황사를 다녀온 적이 있거니와, 그 가을 저녁의 스산함이 묻어나는 들녁을 지나 달마산 중턱에 위의를 갖춘 미황사는 반야용선의 자태를 잃지 않고 빛나고 있던 터였습니다.

 

어린 딸내미에게 구멍가게에서 딱딱한 얼음과자를 하나 입에 물려주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항상 거리를 속여야 했던 여행길. 기차와 버스를 갈아 타고 다니던 지난 날의 기억,미황사의 가을 저녁을 보러 가는 길이었더랬습니다.

 

이제 김태정 시인의 미황사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절집의 늦저녁에서 시작합니다. 생의 절정을 지난 열 이레 달이 주는 완숙한 빛 아래, 절집의 기둥을 받친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달빛이어도 눈물이어도 좋을, 그리운 이의 생애가 시인의 손등에 잠시 앉았다 떠나는 반야심경의 절집. 시인의 노래는 '미황사'라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소()울음 소리로 다가 옵니다.

 

나는 이제 시인이 '미황사'의 언저리에서 행복하기를, 시인의 행복이 시쓰기에 있음을 꼬옥 짚어 바래봅니다. 만난지 벌써 5, 6. 세월의 간극을 지나, 그이를 시집으로 만나는 나 자신도 오랜 동안 잊었던 서정을 물푸레 나무가 물을 길어 올리고 다시 그 물을 푸르게 물 들이듯,되새깁니다.

 

 

미황사/김서정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쫒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 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불생불멸......불생불멸......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을 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