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죽란시첩 -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5. 10. 27. 06:21

다산이 젊었을 적이었다고 한다. 명례동인가 어딘가에서 한창 젊음과 자신감의 패기가 넘쳐났을 적, 뜻이 맞는 벗들과 함께 계를 만든 모양인데....다산의 정원에 대나무를 두르고서 죽란(竹欄)이라 불렀더랬다. 시사(詩社)라는 것은 시를 쓰는 계 (시계詩契, 혹은 수계修契)의 다른 이름인데, 이른바 계꾼들 사이에 규약을 만들었으니,

 

시대의 한계 속에서도 생의 여유로움을 구가했던가? 그들의 규약에서 묻어나는 젊음의 절정은 부럽기만 하다.

 

죽란시사첩 서문 (竹欄詩社帖 序文)/정약용

 

위아래로 5000년이나 되는 시간 속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가로세로 33만 리나 되는 넓은 땅 위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나라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함께 살아간다 해도,, 나이로 보면 젊음과 늙음의 차이가 있는 데다가,, 그 사는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이면, 서로 만난다 해도 정중하게 예의를 차려야 하니, 만나는 즐거움이 적을 것이다. 게다가 죽을 때까지 서로 알지 못한 채 살다가 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더 많겠는가.

 

더구나 이 몇 가지 경우 외에도, 또 출세한 사람과 그렇지 못함에 있어서 차이가 나고, 취미나 뜻하는 바가 서로 다르면, 비록 동갑내기이고 사는 곳이 가까운 이웃이라 해도, 서로 더불어 사귀거나 잔치를 해가며 재미있게 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이 모두 인생에서 친구로 사귀어 어울리는 범위가 좁아지는 까닭인데, 우리나라는 그 경우가 더 심하다 하겠다.

 

내가 일찍이 이숙(邇叔) 채홍원(蔡弘遠)과 더불어 시 모임을 결성하여 함께 어울려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자 의논한 일이 있었다. 이숙이 “나와 그대는 동갑이니, 우리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과 아홉 살 적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와 그대가 모두 동의하는 사람을 골라 동인으로 삼도록 하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과 아홉 살 적은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면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므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하고, 또 앉아 있다가도 나이가 많은 이가 들어오면 일어나야 하니, 너무 번거롭게 된다. 그래서 우리보다 네 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우리보다 네 살 적은 사람에서 끊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열다섯 사람을 골라냈는데, 이유수, 홍시재, 이석하, 이치훈, 이주석, 한치응, 유원명, 심규로, 윤지눌, 신성모, 한백원,이중련과 우리 형제 정약전과 약용 및 채홍원이 바로 그 동인들이다.

 

이 열다섯 사람은 서로 비슷한 나이 또래로,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살며, 태평한 시대에 벼슬하여 그 이름이 가지런히 신적(臣籍)에 올라 있고, 그 뜻하는 바나 취미가 서로 비슷한 무리들이다. 그러니 모임을 만들어 즐겁게 지내며 태평한 시대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모임이 이루어지자, 서로 약속하기를,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초가을 서지(西池)에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한 해가 저물 무렵 화분에 심은 매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기로 한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술을 마셔가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이 어린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주선토록 하고 차례대로 나이 많은 사람까지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게 한다. 정기 모임 외에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승진한 사람도 한턱내고, 자제가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한턱내도록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기록하고 그 제목을 붙이기를 <죽란시사첩>이라 했다. 그리한 것은 그 모임이 대부분 우리 집인 죽란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번옹(樊翁) (채홍원의 아버지 채제공의 호가 번암(번암)이므로 번옹이라 했다) 께서 이 일에 대해여 들으시고는 탄식하며, “훌륭하구나! 이 모임이여. 나는 젊었을 때 어찌하여 이런 모임을 만들지 못했던고? 이야말로 모두가 우리 성상께서 20년 내내 백성들을 훌륭하게 길러내고, 인재를 양성해 내신 결과로다. 한 번 모일 때마다 임금님의 은택을 노래하고 읊조리면서,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을 생각해야 할 것이요, 부질없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나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숙이 나에게 이 서문을 쓰라고 부탁하기에 번옹이 경계해 주신 말씀을 함께 적어서 서문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