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정세기 시인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5. 5. 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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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든 아이를 보며
눈물 짓는 때가 있으니
어느덧 나도 내 아버지가 저승으로 떠난 나이
오늘은 직장 상사에게 꾸지람 받고
네 네 굽신거리고 돌아오는 길
도랑가에 앉아  생각느니
또랑또랑한 물소리가 아이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던들
나는 도랑물에 돌이라도 하나 주워 던졌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젊었더라면 술이라도 거후르고
달보고 짖는 개처럼 헛된 큰소리라도 쳤을 것
그러나 아버지가 된다는 것
도랑가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
도랑물 위에 내리는 달빛처럼이나 고요해지는 것이어라
자식들아 내 아들 딸아
아버지라는 직업은 굴욕이 훈장이구나
밥그릇을 던져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기로구나
밥상에 둘러앉은 너희들의 재잘거림이
비굴마저 받아들이게 하는구나
애비는 오늘 도랑가에 한참이나 앉았다가
별빛처럼이나 맑아져서 돌아가고 있단다
비탈길도 아름답다 여기면서
더러는 눈물 반 웃음 반으로
달을 보며 허허로이 걷고 있는 것이다  


 

 

 

 

 

 

 

 

 

 

 

 

 

 

 

 

 

 

 

 

 

 

 

 

 

 

 

정세기 시인의 글이 작가회의 홈페이지(http://www.minjak.or.kr)에 있기에 퍼 왔습니다.

 

예전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선생님이 부쳐주신 '성당 부근'이라는 시는 수 년 동안 냉장고 문짝에 붙어 산수유 알전구 같은 따사로운 빛을 보여 주었더랬습니다. 발표되기 전에 받은 것이니 꽤차 되었지요. 이사를 하면서 그만 잃어 버렸습니다. (무심하기는.....)

 

아버지로 산다는 것을 이처럼 가슴 아리게 그릴 줄 아는 이의 마음을 제가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만, 도랑가에 한참이나 앉았다가 별빛처럼이나 맑아져 돌아가는 정선생님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배우고 싶습니다.

 

기껏 도림천 천변에다 술취한 후 오줌빨이나 내리 꽂는 필부의 삶을 조용히 지켜보는 듯합니다.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굴욕의 밥상을 이기는 그 역정을 통하여 맑아지는 삶임을 눈물 반 웃음 반으로 허허로이 걸으며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비탈길도 아름답다 여기면서'에서 참으로 많은 내용을 생각케 합니다. 생의 비탈길이 현실의 비탈길과 교호하면서 울리는 자본에 대한 경종을.  최근 현실에 매몰되어 가는 제 삶을 조용조용 꾸짖는 듯합니다.

 

성당 부근  -정세기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 만 성경구절을
성에 낀 창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깃줄이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
저녁 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 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이 스러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안 성가의 낮은 음계를 밟고
양 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