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남해금산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6. 6. 18. 02:33

 

누군가로부터 어디 어디가 좋다는 답사이야기를 듣게된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쯤은 생각해볼 일이다. 흔히들 좋고 또 좋다고 한 이야기 중에 꼭 새겨들어야 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이가 누구와 그곳에 다녀왔는가 하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어느 계절에 다녀왔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덧붙여 왜 다녀왔는가를 살필 줄 안다면야 금상첨화지만.

 

둏아라 둏아라, 이리 시작하는 이야기에는 바로 그 누구와 함께 어느 계절에 왜 그곳에 다녀왔는가가 으레 숨겨져 있게 마련이어서, 여간 눈치가 아니면 절집에서 새우젓을 얻어먹을 요량은 버려야 할 것이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시인의 마을 역시 사실은 바로 그 뒷그림자를 숨기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을 숨겨야 조금은 읽는 이를 원래의 천연함으로 더 가깝게 데려갈 수 있으리라는 얄팍한 계산에서이지, 달리 무슨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다.

 

때로는 나와 동행을 해준 이가 사람이 아니라 시집(詩集)인 바에야......1986년에 나온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은 쪽빛 바다의 남해와 그 바다와 정분을 터고 여지껏 살고 있는 섬 남해를 두루 아우르는 남해의 금산에 대한 설화같은 시이다. 나는 그 설화를 따라 가을 까마귀가 뒤숭숭한 저물녘에 그 곳을 다녀왔거니와, 이로써 함께 동행해준 이와 시절을 함께 밝힌 셈이 되나 보다.

 

어디고 숨어살거나 묻혀 지내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시절이 되고 있다. 혼자 있다거나 혹은 혼자 잠겨 지낸다는 것 역시 수이 이루기 어려운 시절이 되고 있다. 전화, 휴대폰 따위에서 들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신문 텔레비젼 따위에서의 자잘한 타인의 일상이거나 혹은 관계 뜨악한 이들과의 부끄러운 대면 따위의 방해 때문에......

 

   

 

남 해 금 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남해금산』, <문학과 지성 시인선 52>, 서울 1986

 

불행히도 나는 그 여자가 들앉은 돌을 보지 못하고, 떠나가는 그 여자를 끌어 주는 해와 달 조차도 실컷 못보았지만, 그 쪽빛의 바다는 넉넉히 보고왔으니 더도 덜도 없이 미련은 없는 셈인가? 오히려 나는 절집 마당에 비켜서서 저물어가는 하루를 텅빈 마음을 안주 삼아 취하고 있었다.

 

 

 

     남해금산

 

 

 

나는 남해[南海] 금산[錦山]을 한 동무의 고향으로 기억한다

마늘밭 두렁을 밟고 보리싹 내음이 물컹물컹 나던 머시매......

푸른 바다는 관음[觀音]의 눈물 방울인양 맑고 깨끗하여

상주 앞 바다를 마주서면 파도는 갈매기

은빛 날개와 동무하여 뱃길 자욱 뚜렷하였다

동무의 눈동자에 새겨지는 건 떨어지는 저물녘의

햇발이거나 산꼭대기 훠이 훠이 나는 까마귀

깜장 날개가 아니었으리

그날 남해 금산은 구름 짙은 가운데 끝내

나에게는 온 산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리암[菩莉庵] 처마 자락과 입맞춘 동백[冬柏]은 붉은

입술 굳게 다물고 동무의 흔적

뚝뚝 떨어지는 늦겨울 비에 쓸려 낙수 지고......

비단을 두른 것은 금산 자락이 아닐 거란 생각을 언뜻 하였다.

 

남해 금산 보리암엔 쓸쓸한 저녁 해가 어느새 스러지고, 멀리 다도해는 제 한몸 서러움에 절절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는 세상의 저녁을 나는 한 친구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도 이 저녁에는 아마도 고향의 바다를 그리워하리라. 이마여, 벗의 이마여...... 남해 금산의 갈가마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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