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2) - 없애지 못하는 것, 더불어 굴복시키는 것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1. 4. 11. 14:35

현장본에서는 첫머리에 몇 구절이 더 있다.

時,諸苾芻來詣佛所,到已頂禮世尊雙足,右遶三,退坐一面。

具壽善現亦於如是眾會中坐。

공경의 예를 표하는 구절과 수보리 역시 그 청중 속에 묻혀 있었다는 대목이다.

 

금강경의 질문이다.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어떻게 머물것인가,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가 그렇다.

 

현장의 직역본에는 하나의 질문이 추가되어 있다. 

응운하주? 운하수행? 운하섭복기심?

應云何住?云何修行?云何攝伏其心?

나의 관심이 그것이다.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Practicise!

 

현상의 것을 없다고 할 수 없다. 없앨 수도 없다.

거칠게 보면 탐진치 삼독은 현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질문이다. 

금강경의 요체는 여기서 시작하여 여기서 끝난다. 

질문을 안다면야 답은 찾아갈 수 있기에.

 

항복이란 말도 섭복이란 말도 없앤다는 滅이 아님이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도 현장의 번역에서도 확인된 셈이다. 

가장 쉬운 길은 없애는 길이다. 그러나 인생은 가장 어려워보이고 또 그 어려운 길이 늘 정답에 가까왔기에.

 

신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늘 고개마루에 못미쳐 떨구어지는 돌덩이를 오늘도 굴려올리는 시시포스의 삶이

실패한 삶이라 여기지 않는다. 가장 힘든 길을 선택한 그대에게 영광있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 하나가 남게 되는데,

"왜" 중생을 향한 보살심을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마음이 맑아지면 원래의 보살심이 드러난다는 답변은 무책임하다. 

(의미있기는 할 터이다. 인간 본성이 원래 그러하다고.

그러나 계급적 인식이 고착화된 인도땅에서는 그 계급을 인정하고 질문한 것은 아닌지?)

질문은 있으되, 그 질문이 원래 어디에서부터 출발하였는지, 

경의 자기 완결성을 기대해본다. 뒷편에 있으려나!

 

한 가지 더, 경전에서의 맥락을 보자면 선남자 선여인의 발심으로 물어보는데,

답변은 보살 마하살의 수행으로 대답되어 있다.

요컨대 보살된 이가 부처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수행을 말하는 것일진대, 

아공 我空을 체득한 이에게 법공 法空을 설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더하여 실천을 통한 참지혜의 완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가 내가 금강경을 읽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