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4) -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연습하라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1. 4. 11. 23:28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나는 못내 궁금하다.

무소주無所住의 마음 공부인가 혹은 행어보시行於布施의수행인가?

나는 후자에 방점을 가져간다.

물론이지, 보시가 당연하다면 그 보시는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부터의 것이야 한다.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히라(習)고 했지만 우리는 늘 배움에 방점을 찍는 편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갈구하고 것에 대한 연습(meletē)을 말했지만 

나는 늘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공부를 먼저 생각한다. 연습으로 끌고가기에는 뒷심이 부족하다.

늘상 필요한 것은 이 뒷심인데도 말이다.

 

그러난 금강경의 두번째 질문을 상기하자.

云何修行? 현장본에 나오는. 

맑스의 표현따나 인간의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는 마음, 아공 我空을 넘어서,

머문 바 없는 마음으로 연습할 일이다.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현장본에서는 좀더 직설적이다.

菩薩摩訶薩不住於事應行布施,都無所住應行布施

보살마하살은 (고정된 실체나 불변하는 영혼이 있다) 관념에 머물지 아니하고

마땅히 보시를 행하되 일체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요.

 

이제 조금 다른 얘기로 한자 묘(妙)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마라집의 번역본에는 묘(妙)자가 제4장의 제목 이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妙行.

현장본의 경우에는 모두 4곳의 번역문에 등장하는데, 

我當皆令於無餘依妙涅槃界而般涅槃에서

 내가 마땅히 다 의지함이 없는 미묘한 열반의 세계[無餘依妙涅槃界]에서 반열반(般涅槃)하게 하리라. 

如有士夫具身大身,其色自體假使譬如妙高山王에서

假使若善男子或善女人,以妙七寶盛滿爾所殑伽河沙等世界에서

一切善法無不現證,一切善法無不妙覺

일체의 선법은 현재 증득하지 아니할 없고, 일체 선법은 묘각(妙覺:깨침) 아님이 없느니라.

 

 

실체의 규모와 형상을 묘사한 묘고산 妙高山 과 묘칠보妙七寶를 빼고 나머지 두 곳이 문제의 묘(妙)자로 보인다.

그것은 4장의 제목에서 보인 묘행 (妙行) 역시 그러하다.

단순히 미묘함이나 아름다움으로 옮길 일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얻어진"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