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내 맘대로 읽는 금강경 (3) - 마음이 머무는 자리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1. 4. 11. 14:58

질문의 답은 간결하다.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이기에

滅度 無量無數無邊 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되어야 한다는 것.

 

소위 즉비의 구문이 처음 등장한다. 

만약~이 어찌어찌한다면 곧 ~이 아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卽非~性 까지 포함된 구절이 하나 있다.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쪽의 구절을 미리 끌어오자면 위 구절은 

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是名菩薩 이다.

세 번의 보살이 각가 등장한다.

첫 보살이 일반적인 현상으로서의 보살일 터이고,

두 번째의 보살이 본연으로서의 보살자체-자체가 공하다는 것이고보면 그 마저도 맞지 않을 터지만-일 것이며,

그런고로 세 번째의 보살은 관념상, 언어상의 보살일 것이다. 

 

이런 논리구조와는 별개로

답변은 말한다. 

고정 불변하고 윤회하는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

이러한 '나'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다시금 생사를 초월한 고정불변하는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이 나의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관념,

그런 일체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항복시키는 그 곳에 머물라라고.

그러한 관념을 항복시킴으로써 관계와 연기로서의 '나'를 깨달아,

지금 여기서 집착없는 행복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이제 현장 본을 본다.

 

若 諸菩薩摩訶薩 有情想轉,不應說 名菩薩摩訶薩。所以者何?

善現!若 諸菩薩摩訶薩 不應說言 有情想轉,如是 命者想、士夫想、補特伽羅想、意生想、摩納婆想、作者想、受者想轉,當知亦爾。

何以故?善現!無有少法 名發趣菩薩乘者。

 

"만약 모든 보살마하살이 유정 (구마라집은 중생으로 번역하였을 터, 고정불변의 윤회하는 알맹이로서의 '나')이란 생각을 굴린[轉]다면 보살마하살이라고 이름하지 못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선현아, 만약 모든 보살마하살이 유정이란 관념이 굴러간다고 응당히 말하지 아니하면, 곧 영원한 생명이란 관념[命者想] (쟈이나 교의 고정불변하고 윤회하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관념/士夫想/補特伽羅:人衆生/意生想/摩納婆:儒童人/作者想/受者想의 모든 유정상이-색수상행식의 오온이 실재한다는 관념이?) 굴러간다고 (고정된 실체가 있어 불변하여 전하여 진다는 관념) (말할 수 없음을-옳지 않음을) 마땅히 알지니,

또한 그러하니라.

무슨 까닭인가? 선현아, 한 조각의 법(현상, 구마라집은 정해진 법이라 옮겼다) 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름하여 보살승에 뜻을 낸다고 할 것이다. (동국대 번역을 내 방식대로 읽었다.)

 

나로서는 해석이 어렵다. 동국대 번역의 한글 대장경이 이해되는 번역인지도 알기 어렵다.

생각컨대, 현장본은 유정상有情想 (구마라집의 옮김이라면 중생信이 될려나)에 머물지 말라고 이른다.

아니 전轉의 바퀴가 굴러가지 않을 마음에 머물러라고 이른다.

 

굴원의 어부사에서는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라고

사물에 머물지말라고 한 바도 있지 않던가.

해서 나는, 일본 우키요에의 화가였던 호쿠사이의 不染居이란 아호를 좋아한다.

머무는 곳에 물들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