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아버지 등골 빼먹은 얘기를 해야겠다.
고등학교에 들어서자, 촌살림에 세계 문학전집을 장만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일종의 부채같은 것이었다.
이웃집 형이 책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집을 팔고 있었는데,
적어도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갖추어야 한다며 추천한 것도 한 몫하였다.
동서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은 36권짜리 칼라 양장본으로
사실 세로조판을 제대로 읽은 권은 '테스' 정도로 기억한다.
그나마 그것도 영화에서 본 나스타샤 킨스키의 '테스'의 영향이 더 컸다.
(당시 기준으로는 노출이 많았던 영화였다.)
원제도 Tess of the d'Ubervilles 라는 것을 그 때 알았었다.
소설에서는 영화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그려진 영국의 계급제도에 충격이 상당하였다.
뒤적뒤적하며 다른 이 권 저 권을 읽기는 하였으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서울에서의 하숙생활과 애들도 훌쩍 커 버린 지금껏 저 전질을 버리지 못함은,
저 전질의 무게보다 더 큰 아버지에 대한 부채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저 제목의 나열만큼이나 나의 교양은 늘지 않았음에도,
어디가서 아는 '체'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장식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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