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9) - ‘속국’과 ‘자주’는 이미 ‘세력균형’에 배반하는 양자 택일의 대립요인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11. 08:21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강진아 번역, 소와당 講談社 2009

 

4. 독립자주

4-1. 청일 개전


(189쪽) ....서양 각국이 정치적 세력으로 동아시아에 들어온 후부터...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질서는 청일, 조청, 조일의 개별적 세 관계로 성립하고 있었다. 그것이 서양의 출현으로 혼란에 빠져 재편을 강요당하고...

(190) 겨우 약간의 안정을 되찾은 것이 당시의 정황이었다.... 더 근대적이고 극단적인 개념을 사용한다면 보호독립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가에 착안한다면 예 와 법 사이로 불러도 좋다.

이중에 어느 것으로도 제대로 잘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관계가 우리들의 사고와 어휘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사상 事象이기 때문인데, 이로써 우리는 현대인의 사고가 서양 근대의 개념과 편향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어쨌던 그 핵심은 속국이나 보호’, ‘자주독립각각으로 일원화할 수 없는 중간 영역이 있고, ...우연히 극히 일시적으로 함께 멈춰 서서 생겨난 공백이다.

(191) 비스마르크의 퇴진은 독일과 러시아의 재보장 조약이 갱신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요동의 군비 충실은 극동 방면에 대한 러시아의 경계를 자극했다. 각각 러시아.프랑스의 관계 접근과 시베리아 철도의 착공을 촉진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하는 영국과 일본의 위기감을 높였다. 유럽과 요동의 정세가 러시아를 매개로 하여 서로 파급하는 구도가 생겨났다. 그 초점이 된 것이 한반도였다.

(192) (한반도에서 모든 방면에서 우세하였던 청이 속국의 주장을 계속하고 1893년 원세개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한 기회가 되었던 방곡령 사건은) ...일본이 수입하는 주요 산품은 미곡으로, 조일통상규칙에는 방곡령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사전통고가 한 달의 유예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공식적인 항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18901월 방곡령 자체는 철회되었지만, 그 사이 거래 대금으로 대두 수출에 종사하고 있던 일본 무역상이 큰 손해를 입었다. 이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1892년 조선 주재공사에 오오이시 마사미라는 인물을 파견한 데 있었다.

 

<富强策, 오오이시 마사미 大石正己>

(193)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려고 한다면 우리 일본이 나서서 동양의 맹주가 되어 동양에서 가장 이해관계가 큰 여러 강국과 함께 열국회의를 열어...조선을 보호국으로 하고 ... 조선의 독립은 바로 안전, 공고해질 수 있을 것이다.

 

(194) (오오이시 마사미의 파견이 속국자주에 반한다고 간주한) 원세개는... 현안인 방곡령을 악화시켜, 조선과 일본을 대립시키고, ...오오이시 마사미가 무력행사를 진언하여, 최후통첩을 제출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195) ...청일 본국사이에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북양대신 이홍장의 연락과 협조덕분에...조선정부는 배상금 지불에 응하게 되어, 방곡령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96) 조일 관계의 악화가 조청관계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은 1882년 마건충이 기획한 것과 마찬가지 도식이었다.

...때마침 조선에서는 동학운동이 점차 격화되고 있었다.... (197) 조선정부가 두려워한 것은 동학이 배외 행동에 나서는 것으로...그렇지만 자국의 무력만으로는 힘들었기 때문에 외국의 군사적 원조를 구하자는 의견도 나와....

...원세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군사적 원조를 바라는 바였다. 한층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조선을 보호하고 속국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8) 보은의 집회는 어윤중의 강경책과 유화책을 다 동원한 설득으로 어쨌든 수습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894년 이단의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교도는 3월 전라도에서 봉기하여...5월 중순에는 결국 ‘임오.갑신의 선례에 따라 청의 원군을 청하게 되었다. ...(199쪽) 원세개로부터 연락을 받은 이홍장은 곧바로 순양함 두 척을 파견, 65일 인천항에 도착...같은 달...육군 2400명을 아산에 상륙시켜

그러나 반란 자체는 청군의 태세가 갖춰지기도 전에 수습되었다. 동학과 조선 정부 사이에 610일에 전주화약이 맺어져 정부는 반란 측의 요구를 거의 수용하고, 전라도가 농민의 자치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 그런데 610...성취감에 젖어 있던 원세개는 정반대로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한 것이다.

1885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기 위해 ...약속한 천진조약...(200쪽) 장래의 출병에 대해 정한 제 3조였다. 그 주요 내용은 조선에 중대한 변란이 일어나 청일의 출병이 필요할 때에는 사전에 서로 통지한다는 것이다....(일본) 육군도 이미 동원준비를 마쳐 616일에는 혼성여단 4000명이 인천에 상륙해 있었다. 청육군이 상륙한 지 겨우 4개월 후였다.

천진조약에 근거한 상호 통고는 67일에 행해졌다. 청이 자신의 출병을 속방을 보호하는 구례에 따른 것이다라고 공언한 것은 이때였다. 일본은 제물포조약이 정한 재외공관의 보호규정을 파병의 법적 근거로 삼았다. ...일본의 파병은 전체적으로 보아...“권력 평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204) 오토리 공사는...“속방을 보호하는청군의 존재가 조선의 자주를 규정한 강화도 조약 제1조를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7월 20일 최후통첩을 조선공사에게 들이대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침해하는 청군을 퇴각시키라고 요청했다. 조선 정부가 청군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 축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인천, 서울 사이에 있던 일본군은 남하하여 725일 풍도 해전, 29일 성환, 아산 전투가 벌어져 끝내 청일 전쟁에 불이 댕겨졌다..

 

(205쪽) ...그때까지 청과 조선의 종속관계, 즉 ‘속국자주’는 ... 의미 내용이 해석의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중간 영역이 생기거나 군사적으로 완충작용을 해왔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원세개의 책동은 속국을 하나의 의미로 분명히 하고, 청이 종래 자제하여 왔던 무력행사를 야기했다. ... 일본이 최종적으로는 속국에 의거하는 청에게 종속문제를 제기하여 전쟁을 도발한 것도 일본의 국내정치, 개전 시의 사실 史實 경과에 문제를 국한한다면 구실 혹은 수단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206) 청일의 파국이 임박하자, 이홍장은 (청과 러시아가 한반도의 상호 불가침) 합의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조정을 의뢰했다....러시아 당국은 ...그 이상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 한편, 양국에 되풀이하여 정전을 알선했다. 이쪽도이른바 (러시아와 같이)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개전 이후는 청의 허약한 실력에 의심을 품고, 이윽고 일본의 주장과 행동을 용인하게 되었다.

(207)‘속국자주는 이미 세력균형에 배반하는 양자택일의 대립요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력 균형을 제일로 하는 러시아, 영국의 행동이 이 단계에서 특히 속국’, ‘자주와 관계하지 않게 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