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8) - 청일러의 세력균형과 한반도의 군사적 공백화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10. 00:10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강진아 번역, 소와당 講談社 2009

3. 속국 자주의 전개

3-3. 조선 보호의 귀추


(170) 임오군란은 일본에게 심히 원치 않았던 결말이었다...이러한 (청의 대원군 납치, 조선 내정에의 간섭등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 정황을 품은 인물이 참사원 의관 議官 이노우에 코와시였다. ...(171) 이노우에 코와시의 입장에서 특히 문제였던 것은 청의 간섭이 국제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 간섭하고 어디에서 (171) 멈출 것인지가 불분명하고, “영구히 행할지, 또는 일시적으로 행하고 말 것인지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래서는 일본의 정략 政略의 침로 針路”, 즉 대조선 정책 역시 확정할 수 없었다.

<조선정략의견안, 이노우에 코와시> (173) 일본, , 미국, 영국, 독일의 다섯 나라는 ...조선을 중립국으로 삼아...타국으로부터 침략받지도 않는 나라로 하여 다섯 나라가 함께 이를 보호한다. ...조선은 청에 대해 공국 tributary이라고 하지만, 속국 dependency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이 책략이 행해진다면 동양의 정략에서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이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의 요인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청이 주장하는 상국을 시인한 점일 것이다.

...이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데니나 묄렌도르프가 염두에 두었던 것과 완전히 같은 발상이었다. (174) 이노우에 코와시가 의거한 것은 조공 朝貢이 반드시 독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휘튼의 <만국공법>의 설이었지만, 국제법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입장은 달라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75) 이노우에 코와시는 188211월부터 ...일본 외무성 당국을 통해 청과 미국에 타진을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청은 이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속국실체화의 방침을 추진하고 있었다. 또 미국 등 서양각국은 아직 조약의 비준이 끝나지 않아, 공동의 보호나 영구중립화 등을 고려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갑신정변은 단순화시켜 말하면 조선의 당파간 정권쟁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청일의 군사충돌로까지 발전한 경과는, 조선 정부에 고유한 충분한 무력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 이와 동시에 청일 양국이야말로 한반도에 최대의 이해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형세를 다시금 백일하에 드러냈다. 정변 후 일본이 청, 이홍장과 천진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8854월의 천진조약은 조선에서의 공동철병을 결정한 것으로, 이에 청과 일본은 우선 철병하겠다는 자세를 표명...다른 관계국의 입장에서...양국이 철병한 후에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 전망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176) 1882년까지 조선이 우러러 청했던 보호는 말하자면 청 일변도였다. 그런데 보호에 간섭이 수반된는 것을 깨닫자, 조선은...자신에 대한 보호를 청의 독점에서 분리하려고 했는데...조선에서본 대외 관계의 문제는 청만이 가진 것은 아니게 된 보호를 어디에 어떻게 우러러 청할까가 되었다.

이에 갑신정변이 수습되는 18851월 전후부터 조선 정세를 안정시키는 방법이...독일의...발안에 의한 조선 중립화로, 조러 밀약 사건을 일으킨 묄렌도르프의 러시아에 대한 보호 요청은 그것에 이은 것이다. ...

(177) 청일 두 나라에 제3국을 개입시키는 것, 게다가 그 제3국을 러시아로 지정했다고 하는 구도는 동일하며, 청일의 군사력에 유린되고 그런 사태의 재현을 두려워한 조선의 대항 수단이란 점에서 공통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발상에 반발한 것이 영국이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진출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청일 철병에 따른 군사적 공백화에 불만을 드러냈고, 청일 하나 혹은 공동 보호를 기대...) 거문도 점령을 2년간 계속한 것도 그 기대가 한 원인이었다.

(179) 본디 일본의 원칙적 입장은 강화도 조약 이래 조선을 독립으로 보는 것이었다. 청일 양국의 공동보호는 일본이 공식적으로 정한 청의 조선 보호를 승인하여 속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스스로의 입장과 모순되었다.

(180) (청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의 보호는 상국인 청이 담당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조선을 속국으로 위치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다국간에 조선을 보호하고 그 독립을 기획하는 중립화 같은 것은 아예 논외였다. 물론 러시아 단독의 보호인 조러밀약도 청일 양국의 공동 보호도 인정할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아 당시 러시아는 중국 동북, 한반도 방면에서 청과 (181)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진 않았다.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착공되기 전으로, 러시아 극동은 인구가 희박하고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청의 세력이 신장하는 것을 놔둘 수는 없었다...1886년 제1차 조러밀약 사건을 계기로 드디어 (청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실현하게 되었다. 북경주재 임시 대리공사 라듀젠스키가 천진에서 이홍장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한반도의 상호 불가침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했던 것이다.

영국은 갑자기 거문도를 점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은 물론이고 자주조차 없어져도 아무 상관 없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제2차 조러밀약 사건이 지나고 나면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공공연히 지지하기 시작한다. 다국간의 보호, 혹은 청일 양국의 공동보호가 실현될 전망이 없어졌으므로, 그 대안으로 청 (182) 단독의 조선 지배를 공식화, 실질화하도록 촉진했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청의 방식이 국제적으로 통용되었던 것은 일종의 세력균형 상태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 관계로 (183) 말하자면, 천진조약에 의한 상호 철병이고, 청러 관계로 말하자면 이-라듀젠스키 합의에 의한 상호 불가침이며, 조청관계로 말하자면 속국자주의 길항이었다.

이 삼자가 서로 맞물려 세력의 균형이 성립하여, 그 요추에 이홍장의 이른바 자제 自制가 위치했다....결과적으로 한반도는 군사적으로 공백화하여, 중립화와 거의 똑같은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