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11) -  역사적 사실은 재현되지 않을지라도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13. 00:14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강진아 번역, 소와당 講談社 2009

4. 독립자주
4-4 1900년

(240쪽) 1896년 아관파천은 일본이 주도한 개혁과 ‘독립’이 좌절되었음을 결정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선에서 일본의 압도적인 우위를 뒤엎고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노려보는 미묘한 세력균형 (241쪽) 상태를 조선에 가져왔다. 조선은 이상태로부터 새롭게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상대는 청이었다.
(241쪽) 이에 전기를 가져온 것이 1898년 3월말 러시아의 여순, 대련 조차였다. 중국의 이러한 과분 瓜分 움직임은 청에 변혁의 기운을 높여, 대외적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청은 이에 드디어 ‘속국’ 조선을 ‘우방’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이 된 기정사실을 추인하여, 1899년 대한제국과 대등한 통상조약을 맺은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이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러시아도 또한 만주에 결정적인 군사적 진출을 하지 않은 세력균형은 이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898년 4월 러시아의 여순, 대련 조차가 확정되기 앞서, 일본의 외무대신 니시 도쿠지로와 주일 러시아 공사 로젠과의 사이에 협정이 밎어졌다. 그 내용은...한국의 독립과 내정 불간섭, 한국에서 일본의 경제적 우위를 (242쪽) 정한 것이다. 일본은 이에 따라 러시아의 여순, 대련 조차를 묵인했다.
...이 세력균형은 청일전쟁 이전에 조선의 ‘속국 자주’를 담보한, 한반도의 군사적 공백 상태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때 조선은 일본의 후퇴로 확실히 명목적인 ‘독립’은 잃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을 얻음으로써 실질적인 ‘자주’를 회복할 수 있었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으로붙어 1899년 한청통상조약의 체결에 이르는 경과는 바로 그 점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243쪽) 그런데 벌써 1900년에 갑자기 그러한 전제조건 (국제적 세력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화단 사건의 발발과 이에 수반한 러시아의 만주 점령이 일어났던 것이다. ...(청이) 대외적으로 그렇게 큰 군사력을 가지지 않더라도 만주를 영유하는 한 전과 다름없이 러시아와 한반도를 갈라놓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청의 존재는 그러한 의미에서, 청일 전쟁 후의 세력 균형 상태에 기여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244쪽)러시아는 이전부터 중동철도나 여순, 대련의 조차지 등 만주에 적지 않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군을 투입한 군사점령은 그러한 이권의 보유과는 이미 차원이 다른 사태였다...세력을 확대한 러시아는 그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를 시야에 넣게 되었다.
(245쪽) 한반도가 적대세력, 특히 러시아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일본열도의 “머리위에 칼이 매달리는”...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메이지유신 이래의 의식이었기 때문에...(일본은) 그 때까지 떼놓고 생각했던 만주와 관련시키게 되었다.

...한국 중립화안은 1900년 8월 주일 한국공사 조병식이 일본에 제시한 것을 효시로 하고...(246쪽)한국 정부의 의도는 독립 자주와 그 전제를 이루는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한편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을 “열국 보호하에서 중립국 (247쪽)으로 하는” 중립화 안은 곧 국제적으로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세력균형이 러시아의 만주 점령으로 붕괴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이다.
(248쪽) 일본 입장에서 러일 양국만으로 이해가 수렴하고 말아서는, 다른 국가간에 보장하는 중립화에 실효를 찾기 어려웠다. ....(249쪽) 이리하여 1900년 이후가 되면, ...한국이 추진한 자국 중립화 정책은 만주에서 압박하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느끼면서, 어떻게든 권력 균형과 독립자주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만주와 관련하여 한반도를 다투려고 하는 일본과 러시아의 이해에 대항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에 대해 일본의 입장은 이제 만주와 한반도를 분리하는 입장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만주 점령과 세력균형의 붕괴에 직면해서는...일본진출을 방해하는 한국 중립화는 어떻게 하더라도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250쪽)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제1차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 한국에서 일본의 ‘특수한 이익’을 승인한 이 동맹은 물론 극동에서 러시아의 남하에 대처하려고 하는 것이었지만...
   (일본의 이해관계를 위해 러시아를 선택할 것인가, 영국을 선택할 것인가에 있어) 러시아는 만주를 확보하기 위해, 남방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대한 장벽을 두려고 했다. 그 일환으로서 한국 중립화 정책이 있었다.
...반대로 영국과의 제휴를 우선한다면, 한국에 대한 정책에서 이러한 제한이나 속박은 없어지게 되었다. ...(251쪽) 일본은 우선 영일 동맹을 선택했다. ...과연 러시아는 겨우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1902년 4월 8일 청과 맺은 만주 반환조약이 그것으로 ...
   러시아는 제2차 철병을 이행하지 않고 만주에 눌러앉아 남하를 재개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이해조정이 최종적으로 결렬되어, 마침내 파국에 이른 것이다. 이는 동시에 한국의 명운을 결정짓는 사전이기도 했다.
에필로그
(252쪽) 1904년 2월 10일 러일 전쟁 발발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조인
후자는 일본군이 한국 내의 전략 요지를 수용하도록 승인한 것이다. 러일 전쟁은 청의 영토인 만주를 전장으로 하였다. 거기에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전부 장악해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러일 전쟁의 결과, 일본의 승리는 자주의 상실을 불가피하게 했다.
(253쪽) 1905년 10월 16일 포츠머스 조약 공포
1905년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정 조인
  후자는 한국의 보호국화를 정한 것이다. 이것으로 명실공히 한국의 자주는 상실되었다.
...한일의 대립은 점점 험악해졌다. 한국 병합으로의 출발이었다.

<청일전쟁 전야에 젊은 정치가 커즌의 의견>
(254쪽) 조선은 본질적으로 약소국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유일무이한 강점이다...그렇지만 일, 청, 러의 삼대 근린국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서로 견제를 계속하는 한, 조선은 그 사이에 개재하여 무력침공을 면할 수 있다...조선이라는 국가의 영속은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달려있다.
(256쪽) 그러므로 아마 이 책에서 서술한 역사는...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재생되는 일은 있을 수 없을지도, 과거의 여러 다양한 선택지와 가능성의 형태를 모색해보고, 미래에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하는 데 참고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일본인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가 반드시 거기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