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다시 읽으며....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2. 12. 23. 19:37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겄네.

 

*

이제는 이 한 권만이 덩그마니 책장에 꽂혀있다. 그이의 산문집

흔히 인터넷 상의 시해설에서는 이 시를 제삿날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제삿날의 불빛은 양반네들이 논길을 따라 등롱(燈籠)을 들고 큰집을 찾아가는 늦은 밤 시간대이고,

(예전의 제사는 자정을 지나 지냈었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려면 해 질 녘의 노을 시간대이다. 

그리고 경상도 말의 어감을 알아듣는 이라면 

저 표현이 제삿날의 불빛도 (서럽거나 눈물 나거나 하는) 불빛이(라고 할만 하)지만,

해질녘의 가을 강이야 말로 장한 불빛처럼 잔물결로  '흐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더구나 '모이는'이라는 동적 표현과 '강'이라는 흐름이 노을 속에 부서지며 함께 하기에 더욱 그렇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친구의 (헤어진)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화자 역시도 헤어진 사랑으로 마음 둘 데가 없는 '마음도 한 자리에 못 앉아 있'을  때 마침) 

역설적이게도 따스한 가을 볕을 맞으며 산 등성이에 올라

노을에 부서지는 가을 저녁의 강물을 눈물로 바라보며 읊은 시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더구나 '네보담도 내보담도'에서 

친구와 시인(화자)가 같이 등장하고 있음에랴.

너의 사랑이야기보담도, 마음도 한 자리에 못 앉아 있는 나(의 사랑이야기) 보담도.

 

소리의 처음 (혹은 사랑의 처음), 첫사랑의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사랑 끝에 생긴 '울음' (소리)까지 녹아나고,

'소리' 죽은 가을 강은 

이제 (사랑을 잃고 ) 미칠 일 하나만 남아 (소리가 죽어버린) '울음'이

(소리 내지 못하고 그냥 불빛) 타는 가을 강으로 흐르나 보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등롱의 불빛과 같이

잔광으로 흔들리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노을 아래의 가을 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