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일상생활의 구조 상, 주경철 옮김, 까치
제2장 일상의 양식 : 빵
15-18세기에 사람들이 먹는 기본 음식은 주로 식물성 음식이었다...단지 칼로리 수치만을 기준으로 하여 경제적 결정을 한다면 똑같은 면적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목축보다 월등이 유리하기 때문이다....곡물이냐 고기냐의 선택은 인구수에 달린 것이다. 이것이 물질 문명의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이다....어떤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는가는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그를 둘러싼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 말해준다. (135쪽) 어느 한 문화에서 다른 문명으로 들어가는, 즉 인구밀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통과해 들어가는...여행자는 음식이 크게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136쪽)
유럽인들은 전체적으로 육식성이라고 할 수 있다...그 이유는 지중해 연안 지역 너머에는 가축을 풀어놓을 넓은 땅이 남아있어서 그 결과 유럽의 농업은 목축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시 이후부터는 인구가 증가하면 식물성 음식을 많이 먹게 된다는 일반적 준칙이 적용되기 시작하여 이러한 우월성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137쪽)
이 음식상의 선택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논쟁은 아주 오랜 과정의 산물이었다. ..사실 인간이 먹는 음식의 운명을 대강 결정하고 원격 조정하는 것은 오래전에 일어난 두 혁명이었다. 구석기 시대 말기에 "잡식동물"인 인간은 큰 동물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이때 형성된 "대육식주의"의 취향, 즉 고기와 피에 대한 요구, '질소에 대한 탐욕', 또는 달리 표현하면 동물성 단백질에 대한 탐욕은 사라지지 않았다. (137쪽)
기원전 7000년이나 기원전 6000년에 일어나 두번째 혁명은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이다. 이때에 곡물재배가...사냥터나 조방적인 목축지역이 줄고 대신 논밭이 늘어났다. (138쪽)...고대 그리스에서는 "보리죽을 먹는 사람은 전쟁을 할 욕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수백년이 지나서 1776년에 한 영국인은..."보다 가벼운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도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서 더 큰 용기를 발견한다."
이제 15-18세기의 기간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주요 식량, 즉 모든 산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인 농업에 의해서 획득되는 식량이다. 그런데 모든 농업에는 시초부터 하나의 중요한 작물이 있었고 - 또는 있어야 했고 - 이 선택에 따라 그 다음의 모든 것, 적어도 거의 모든 것이 의존하게 되는 일종의 우선권이 형성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는 밀, 쌀, 옥수수였다. ... 이것들은 인간의 심층적인 물질생활과 때로는 정신생활을 조직하여 결국 되돌이킬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문명의 작물"이다. 이 작물들의 역사, 농민과 더나아가 일반 사람들의 생활 위에 이 작물들이 행사하는 "문명의 결정주의", 이것이 이 장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140쪽)
밀
밀이 도처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유럽의 팽창을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42쪽)...밀의 동반자로서...남쪽 지방에서는 보리가 말의 사료로 쓰였다. 그래서 16세기와 그 나중 시기에 터키 인과 기독교도가 전쟁 상태에 있던 헝가리 국경에서는 보리 수확이 안 좋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44쪽)...의지할 만한 또 다른 곡물로서 쌀을 들 수 있다. (144쪽)...쌀은 그 외에도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고시으로 퍼져나가서...넓은 땅에서 활발한 경작이 이루어졌다. 이 벼논들이 자본주의적인 배경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농민의 노동력을 프롤레타이아화했다. 이것은 벌써 il riso amaro "맛이 쓴 쌀", 즉 사람들의 큰 고통의 산물이 되었다. (145쪽)
어디에서나 밀과 보조 곡물 사이에는 명백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밀 가격은 귀리 가격보다 항상 더 많이 오른다. 그 이유는 적어도 부유한 사람들이 밀빵을 먹고 사는 습관 때문이다. 이에 비해 귀리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은 말을 시골의 풀밭에풀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밀과 귀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사람과 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뒤프레 드 생-모르는 밀 가격과 귀리 가격이 3:2 정도 되는 것을 정상적인..."자연naturel" 비율로 보았다. (146쪽)...이 비율이 깨지는 것은 곧 기근을 의미하며, 이때 비율이 깨지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기근이 심각하다는 거시을 나타낸다. (147쪽)
가장 중요한 비료의 원천은 가축이었다...간단히 말해 밀 경작과 목축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 그러므로 페르디낭 로에 의하면, 유럽에서는 밀이나 다른 곡물들을 재배하면서 도저히 어떤 균열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굳게 결합된 관계와 관습의 복잡한 체계가 조직되었다. (154쪽)...생산선을 증대시키니 위해서는 비료를 증대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나 말 같은 큰 가축들을 많이 길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목축지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결국 밀 재배지를 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55쪽)...곡물을 재배하는 데에는 쟁기를 끌고 분뇨를 제공하는 가축이 필요했고, 목축을 하는 지역에서는 반대래 곡물이 모자랐으므로, 이런 것이 대조를 보이면서도 상호 보충을 해준 것이다. 서구문면의 식물 결정론 determinisme은 따라서 밀 하나만이 아니라 밀과 풀 모두에서 나온 것이다. (159쪽)
밀, 호밀, 귀리, 보리dml 4대 주요 곡물만을 놓고 파종량에 대한 수확량의 비율을 계산하면 (163쪽)...(1249년 이전 3.7:1에서 1820년 4.7:1, 1820년 7:1, 그 이후 10.6:1 이상을 보이고), ...개략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로 이 무렵 (1250)이 유럽의 초기도시들이 형성되거나, 혹은 정세 전기 haut Moyen Age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도시들이 재발전을 이루던 시기이다. 도시가 곡물 생산의 잉여에 의존할 수밖에 업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빈번히 파종면적이 증가했다는 것, 특히 매번 인구가 증가할 때 그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강, 석호 늪지의 물을 빼고, 산림이나 landes의 나무를 베고 땅을 얻는 느린 작업들이 유럽을 끊임 없이 괴롭혔다. (164쪽) 이것은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했고 흔히는 농민의 생명을 대가로 하여 이루어지기고 있었다. 농민들은 자기 영주의 노예일 뿐만이 아니라 밀의 노예이기도 했다. (165쪽)
전체적으로 보아서 시골에서는 도시에서보다 훨씬 많은 빵을 소비하며 최하층으로 갈수록 더 많이 소비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누구든지 그것 이외의 먹을 것을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많은 빵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빵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물론 같은 칼로리를 얻는 데에 밀이 상대적으로 가장 싼 음식이기 때문이다. (177쪽)...가난한 사람에게는 밀이 모자라면 모든 것이 모자라게 되었다. 밀이 생산자, 중개인, 수송인, 소비자들을 노예처럼 장악하고 있었던 문제의 비장한 측면을 잊지 말자. 언제나 동원령과 경계령이 필요하다. "사람에게 자양분을 주는 밀은 동시에 그 사형 집행인이다"라는 세바스티앙 메르시에의 말도 결국 같은 뜻이다. (178쪽)
도시의 임금 노동자들은 비참했고, 현물임금이 거의 같은 리듬으로 변화했던 시골 사람들 역시 비참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명료한 규칙을 따랐다: 그들은 저급한 곡물에 의존했다. 즉, "더 싸면서도 충분한 칼로리를 제공하는 생산물에 의존하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 대신 전분에 기초한 음식을 먹었다." (181쪽)
쌀
라부아지에(1743-1794) 시대에 프랑스에서 밀밭 1 헥타르의 땅으로는 5캥탈 (1 quintal = 100 kg)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1헥타르의 논에서는 도정을 안 한 쌀로 쳐서 흔히 30캥탈까지 수확이 가능했다. 이것을 도정하면 21캥탈이 되며, 이것을 다시 칼로리로 계산해보면 1킬로그램의 쌀이 3,500칼로리를 내므로 전부 735만 칼로리가 된다. 이에 비해 밀의 경우에는 150만 칼로리이고, 또 이 땅을 목축에 사용하여 150 킬로그램의 고기를 얻게 도면 모두 34만 칼로리를 얻는다. 이 숫자는 논과 채식이 가지는 엄청난 우월성을 말해준다. (202쪽) 동양문명이 채식을 선호하는 것은 확실히 이상주의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203쪽)
쌀이 성공을 거둔 데에는 광범하고도 명백한 요인이 있다. 논은 아주 작은 공간만을 차지한다는 것이 첫번째 중요한 점이다. 두번째로는, 쌀이 높은 생산성을 가짐으로써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의 많은 인구를 먹여살린다는 점이다. (207쪽)...
중국이 치수사업과 집약적인 곡물생산을 하면서 중국 사상의 고전적인 농촌 풍경을 형성한 것이 한나라 시대인 이때쯤이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고전 중국이 시작된 것, 즉 기존 구조들을 부수고 새로 혁신을 가져온 장기적인 농업혁명으로부터 고전 중국이 나타난 것은 지독하게 느린 문명의 리름에 따르자면 바로 어제 일어난 일과도 같다. (209쪽)
자신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던, 벼를 재배하는 남부 중국에서는 중국인들이 산지를 정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거의 모든 가축을 내쫓아버리고, 밭벼를 재배하는 비천한 산지인들에게 문호를 닫아버린 연후에 이들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했다. ...반면 말, 노새 , 낙타는 북부에만 있었는데, 사실 북부는 벼를 재배하는 곳이 아니었다. 결국 벼를 재배하는 중국은 자기자신에게 갇혀버린 농민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210쪽)
도쿠가와 시대 (1600-1868) 일본은...농산물의 상업화가 점차 더 크게 진행되면서 대규모의 살 교역을 가져왔고, 독점 상인들이 나타났으며, 면화, 유채, 삼, 담배, 채소, 뽕나무, 사탕수수, 참깨, 밀 등의 보조 작물도 급성장했다. ...이 작물들은 농업수익을 증대시켰지만 다른 한편 벼 재배보다 두 배나 세 배의 비료를 필요로 했고 인력도 두 배나 필요로 했다. 논이 아닌 "밭"에서는 흔히 보리, 메밀, 순무의 세 작물을 연결하는 재배가 이루어졌다. 벼는 아주 무거운 현물지대를 내야했던 (수확의 50-60 퍼센트를 지주에게 바쳤다) 반면 이 새 작물들의 경우는 화폐지대를 냈다. 그럼으로써 농촌세계가 근대경제와 관계를 맺게 되었(211쪽)다....
쌀과 다른 곡물들은 너무나 광대한 이 (인도) 대륙의 사람들을 불완전한 정도로 밖에는 먹여살리지 못했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18세기의 인구압력은 극적인 기근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쌀이 전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도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쌀만이 지난날과 오늘날의 인구과잉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요인일 따름인 것이다. (212쪽)
옥수수
더욱이 사람이 먹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가축의 사료로서 휴한지에서 재배할 수 있는 옥수수는 바로 같은 휴한지에서 재배하여 성공을 거둔 사료작물의 경우와 유사한 "혁명"을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풍무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이 작물이 점차 많은 부분의 토지를 차지하면서 상업화된 밀 생산을 증가시켰다. 농민은 옥수수를 먹고 대신 값이 두 배나 되는 밀을 내다 팔았다. (225쪽)
**
결국 지배적인 작물이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세계의 좁은 지역에서만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밀집한 인구, 완수된 문명 또는 완수중인 문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게다가 지배적 작물이라는 표현에 우리가 혼돈해서는 안 된다. 대규모의 사람들이 어떤 지배적 작물을 선택하면 그것이 그들의 생활양식에 뿌리를 내리고 그 결과 그 생활양식을 형성하며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속에 그것을 가두게 되지만, 그 반대 방향의 것 역시 사실이다. 즉, 그 어떤 지배적 작물의 성공을 확립시키고 허용하는 것은 지배적 문명인 것이다. (236쪽) ...식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변상황과 맞아떨어져야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바로 이 특정한 경우에서 역사가 배반을 한 것이다. 카사바와 열대지방의 줄기식물, 어떤 특정한 종류의 옥수수 그리고 바나나, 빵나무, 코코넛 나무, 야자나무 같이 하늘이 내려준 듯이 소중한 과수에는, 벼나 밀을 재배하는 사람들만큼 뛰어난 것은 아니면서 대단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집단의 사람들-줄여서 "괭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확고부동하게 매달려있다. (237쪽)
에스터 보즈랩은...먹여살려야 할 인구가 증가하고 그것이 토지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과 상충하게 되면 결국 숲의 복구에 바쳐지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리듬의 변화가 다음에 도구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설명에서 도구의 변화는 원인이 아니고 결과인 것이다. (238쪽)
우리는 수천년에 걸쳐 늘 다시 출발하는, 그리고 답보하는 인간의 모험이 하나이며, 공시성과 통시성이 함께 만난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더욱 많이 살펴볼 수 있다. "농업혁명"은 기원전 8000-기원전 7000년 전의 오리엔트에서와 같은 몇몇 특권적인 곳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을 퍼져가야 했으며 그 진보는 결코 단 한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경험들은 끝없이 긴 똑 같은 여로를 따라가지만, 그것은 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247쪽)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를 읽으며 (0) | 2023.01.10 |
---|---|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다시 읽으며.... (0) | 2022.12.23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페르낭 브로델 - (4) 일부 부유한 사람이 지나치게 잘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일반법칙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0) | 2022.08.09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페르낭 브로델 - (3) 인간에게 호의적이든 아니든 달력은 인간의 지배자이다. (0) | 2022.08.09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 페르낭 브로델 - (2) 인구증가의 압력은 보통때보다 쉽게 가능성의 한계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0) | 2022.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