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이제이아 벌린 - 낭만주의의 뿌리 (Ch.4) 인간, 적어도 그의 전부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8. 3. 21. 11:37

Ch.4.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칸트는 과학의 신봉자였다. 그는 엄격하며 극도로 명징한 정신의 소유자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글을 썼으나, 모호하게 쓴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점에서든 낭만주의자들의 아버지라면, 이는 과학의 비판자로서도 아니고 당연히 과학자 자신 (그는 우주론자였다)으로서도 아니니,

이는 명확히 그의 도덕 철학에 의한 것이다.

그가 자라난 독일 경건주의적 배경은 그를 열광적인 자기성찰로 이끈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이고 도덕적인 삶에 열렬히 몰두하게 했다.

칸트는 사실 인간의 자유라는 관념에 경도되어 있었다. (114쪽)

 

다른 자연의 대상물이 인과법칙 아래 놓여 미리 결정된 인과관계의 도식을 엄격히 따르는 데 반해,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이것, 자유의지가 인간을 자연의 다른 대상과 구별해 준다. (115쪽)

타인에게 의존하여 존재하는 인간은 더는 인간이 아니며, 자립을 상실한 인간은 결국 타인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117쪽)

칸트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닌 자기자신만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행위는,

어느 것이나 한 인간이 또 다른 한 인간에게 강요하는 가치하락의 한 형태이자.....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유를 박탈하는 착취로 보았다.

가치는 인간스스로 만들어 내는 실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18쪽)

가치란 천공에 떠 있는 별들이 아니니, 그것은 내면적인 것이며 인간이 자유롭게 전념하기로, 또 그것을 위해 싸우고 목숨까지 바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120쪽)

 

칸트의 관점에서 인간을 가로막는 장애물 (인간의 노예상태)보다 더욱 나쁜 것은 결정론, 즉, 자연에 의해 노예가 된다는 악몽같은 사상이다.

생명없는 자연에 대한 의심의 여지 없는 진리가, 즉 인과관계의 법칙이 인간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도 진리라면, 그때는 사실상 도덕이 존재하지 않게된다.

유물론적 결정론은 어떤 자유나 도덕과 양립할 수 없고, 반드시 거짓이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관대함은 악덕이니, 관대함은 궁극적으로 오만과 생색의 한 형태.....동정이란 동정하는 쪽의 어떤 우월함을 함축하기 때문에......

불쌍한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에 대한 가장 두려운 모욕이었다.

칸트에게는 '자연'은 최악의 경우 적이며, 좋게 보아도 인간이 형상을 부여하는 중립적인 질료에 불과하다.

인간이 어떤 이상에 헌신하기 때문에, 자연에 자신을 새기고, 그로 인해 자연은 마음대로 형성할 수 있는 질료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부분이 아니라 적어도 그의 전부는-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126쪽)

 

* 유물론이 한국적 해석에서의 곡해의 우려를 생각한다면 기계론으로 번역하여 읽으면 오히려 명징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다만 그의 자연관은 사물에 대한 장애로서의 자연법칙 (인과관계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주체적 인간을 설정하는 한 기제가 될 수 있다.

해서, 칸트가 아이쟈야 버어린의 입을 빌려 표현한대로, 적어도 인간, 그의 전부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이 자연과학자로서의 칸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낭만주의적 메시지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있어서, 중대한 갈림길에서 팔짱을 낀 채 자연에 맞서는

이 반항-여느 반항과는 달리 인간이 진정으로 헌신하는 어떤 이상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도덕적 반항-이

비극을 만드는 요소이며, 비극한 반항이 갈등을 빚어내기에 생겨나고, 인간은 이 갈등 속에서 경우에 따라

자기보다 지나치게 거대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은 힘들에 맞선다. (130쪽)

실러에게는 동물적으로 행동하거나 정욕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은 혐오스럽거나 수치스런 인간으로 비극적 인물이 되지 못한다.

예술의 목적은, 최소한 극예술의 목적은 우리에게 가장 인간다운 방식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시대와 세대의 기준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아주 결백하지도 않고 비극적으로 불행하지도 않은,

전적으로 평범한 삶을 살면서 그저 상투적인 감정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데, 이는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134쪽)

자신이 속한 사회에 쓸모있게 쓰이지 못하는 잉여인간이기에 무익한데,

그 쓸모없는 까닭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도덕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그들의 도덕성이,

그들이 살고있는 사회의 속물들과 노예들, 타율적인 자들의 지독한 반대에 맞서 자신을 주장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135쪽)

 

잉여인간과 다른 계보로서 위대한 죄인의 계보는,

만일 올바른 도덕성의 획득이 불가능하다면, 그 안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차단되어 있다면,

그러한 사회는 때려 부숴 마땅하며, 파멸하거나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며, 어떤 범죄도 허용된다고 말한다. (135쪽)

 

실러에 따르면,

1단계 : 야만(미개, 본성 충동)을 따르며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 필연의 국가에서,

2단계 : 우상을 숭배하며 이유도 모른체 금기를 숭배하는 합리적인 권위를 요구하는 이성의 국가로,

3단계 :(정욕과 이성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유가 필연과 분리되지 않았던 황금시대에서) 노동과 불평등, 문명이 분리되어 소외가 생겨나게 되는데,

예술이라는 수단을 통해, 예술에 의한 해방을 통해 황금시대(유토피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실러의 유희충동 개념이다. (139쪽)

 

실러 주장의, 인간의 사상사적 의미는, 이상이나 목표나 목적들은 직관.과학적수단.성스러운 문서읽기.전문가의 권의로서 발견될 수 없으니,

이상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하는 것이며,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 (예술작품을 창조하듯이)이라는 생각이다.

 

실러는 하늘을 나는 새는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리 잘못된 생각이라해도,

우리 눈에 새들은 중력을 극복하고 날아올라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필연성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42쪽)

 

피히테는, 삶은 자연이나 자연의 대상에 대한 무관심한 관조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삶은 행동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로 알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의 요청이 있기에 아는 것이다.

세계는 인간 내면의 삶이 꿈꾸는 詩이다. (피히테, 145쪽)

피히테의 생각은, 한 개인-자연의 수천 가지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한-의 정신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에게 공통되는 정신,

유기체적 전체를 형성하는 타인들의 창조물로서의 경험적 인간존재를 상정하게 되고, 개인이란 개념에서 (자유로운) 국가.종파.계급으로 나아간다.

 

*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개체가 아니라 운명을 창조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꿈꾸는 것이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다면, 시스템이나 구조에 대한 조망이 없다면 그 귀착점이 어디일지는 피히테가 보여주는 한 단면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