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이제이아 벌린 - 낭만주의의 뿌리 (Ch.5, 6) 타오르는 불꽃은 그 불을 끄지 않고는 정확하게 서술할 수 없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8. 3. 21. 13:04

Ch. 5. 해방된 낭만주의

 

낭만주의의 폭발....이 운동 전체에 미학적인 측면 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으로도 깊은 영향을 미친 세가지 요인이 있는데,

피히테의 지식학, 프랑스 혁명,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가 그것이다. (153쪽)

 

피히테의 지식학 :

칸트에 이어 피히테는 이른바 인식의 대상이 아닌 "나", 주체로서의 "나"는

결코 인식의 작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충격을 주는 어떤 것, "장해", "충돌"을 통해 인식될 따름이다.

그는 이것을 모든 경험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범주로 여겼다.

과학에 의해 기술된 세계는 이 절대적으로 기본적이며, 환원될 수 없고, 근본적인,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존재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다. (155쪽)

 

인간은 오직 저항이나 반대에 부딪힌 순간에만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각한다.

지배와 반역은 이것이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모두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지점이다. (159쪽)

 

셸링에 따르면, 자연 만물에 생명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 인간이 자연의 가장 자각적인 대표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예술가의 임무는 자신의 내부를 탐색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내부에서 움직이는 어둡고 무의식적인 힘들을 탐색하여,

이것을 가장 고통스럽고 격렬한 내적 투쟁을 위해 의식의 세계로 끄집어 내는 것이다.

셸링에게 예술작품이란, 유일하게 가치있는 것은 완전한 의식에 이르지 않은 생명력의 파동을 전달하는 자연과 유사한 작품들이다. (161쪽)

 

피히테의 의지에 대한 사상과 셸링의 무의식에 대한 사상이 결합하여....상징주의이다.

상징하는 단어가 가진 감정적인 파급력 전체가 더 모호한 동시에 더 의미심장한 무엇으로까지 확장되기 때문인데....

우리는 오직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수단을 통해 전달 가능한 무언가를 전달하려 애쓰나,

이것으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전달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니,

이 전체는 말 그대로 무한한 까닭이다. 이것이 알레고리와 상징이 사용되는 이유이다. (166쪽)

분명 우리는 그 작품의 심오함 (깊이)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려 하겠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자마자 우리가 얼마나 길게 이야기하든 새로운 간극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언제나 말줄임표로 끝을 맺어야 한다.(168쪽)

타오르는 불꽃은 그 불을 끄지 않고는 정확하게 서술할 수 없다. (171쪽)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살아있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뜻.....

 

프랑스 혁명 :

독일인에게 뚜렷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혁명은 인간의 불행에 대해 평화로운 보편주의에 입각한 완벽한 해결책을 약속했음에도,

혁명이 주목했던 이성, 평화, 조화, 보편적 자유, 평등, 해방, 우애 따위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폭력과 공포, 인간사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선악을 떠나 이들 폭도를 지배하고 역사의 추이를 마음먹은대로 바꿀 수 있는 이들이 가진 엄청난 힘이었다.

혁명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사상, 즉 어떤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청사진으로 여겨졌던 사상이

실은 적절치 못함을 증명했다. (178쪽)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개념......으로부터 실로 전체 우주를 18세기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두려운 세계로 만들었다.

 

*여기서 앨버트 허시만의 <반동의 레토릭>을 상기하는 것은 흥미롭다. 행동하는 것이 살아있는 낭만주의자들의 모토였다면 그러한 행동의 한 페이지인

프랑스 혁명의 실패를 논한다는 것은 어찌 반동적이다. 행동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질문이 유효한 대목이다.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에스터> :

소설이 지닌 이야기로서의 힘과는 별개로.....괴테는 갑작스럽게 활홀경에 빠지며 감상적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설명하면서

시적인 문장을 쏟아내다가, 마찬가지로 눈깜짝할 사이에 완벽히 서정적인만 엄정한 산문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시에서 산문으로의, 황홀경에서 과학적인 설명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은

낭만주의자들에게는 현실을 전복시키는 마술적인 장치로 보인다.

예술의 임무는 인간해방이고, 예술은 피상적인 자연의 조화와 피상적인 규칙들을 무시하며

하나의 양식에서 또 다른 양식으로 민감하게 변화함으로써 인간을 해방하고,

우리를 에워싸고 속박하고 가두는 무수한 관습적인 구분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180쪽)

 

* 숙제가 생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에스터>를 단지 성장소설 (인격의 도야?)로 읽었던 적이 있다.

이제 시와 산문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낭만주의자의 눈으로 읽어보아야 한다. 한글 번역으로 이러한 맛을 느낄 수 있을지는.......

 

18세기의 보편 명제이자, 사실상 그ㅡ 이전의 모든 세기의 보편명제는, 사물의 본성과 사물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85쪽)

낭만주의자에게는,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의지와 사물의 본성이 있다는 진리의 거부, 만물에 불변의 구조가 있다는 개념을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시도는

매우 의미있고 중요한 운동의 가장 심오하고, 어느 정도는 가장 비정상적인 요소들이다. (190쪽)

 

Ch. 6. 지속되는 영향력

 

18세기 중반 전까지......과학은 순종이며, 사물의 본질에 인도를 받는 것이고, 대상에 대한 면밀한 주의이자, 사실로부터 일탈하지 않는 것이고,

이해와 지식과 적응이다. (곧, 지식은 선이다.) (194쪽)

낭만주의자에게는,

1) 불굴의 의지에 대한 개념으로, 인간이 성취하는 것은 가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가치의 창조라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어쨌든 어느 정도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선택한 대로의 세계라는 것이다.

2) 사물의 구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쉼없는 흐름이 아니면, 부단한 세계의 자기 창조 뿐이다.

   외부세계 및 자신의 내부에서, 질료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전체를 거대한 자기조직화와 자기 창조의 과정으로 바라봄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196쪽)

 

낭만주의자들은, 실재에 대한 통찰을 어떻게 얻어야 좋은지를 스스로 물어 보았을 때,

유일한 방법은 신화와 상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이다......따라서 우리는 현대의 신화를 가져야만 하며......우리는 그것을 손수 창조해야만 한다.

모든 예술은 상징에 의해 삶 그 자체인 이 부단한 활동의 표현할 길 없는 이상을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199쪽)

 

낭만주의는 인간의 실존에 있는 어떤 측면, 특히 인가나 삶의 내적인 측면을 인식했는데, 이 사실이 이전에는 전적으로 무시되었고,

따라서 전체적인 실상이 매우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낭만주의가 오늘날로 이끈 운동 중 하나는 프랑스의 소위 실존주의 운동으로,

실존주의는 낭만주의의 진정한 후계자로 여겨지는......(223쪽)

인간은 반드시 자유로와져야 하고, 최대한 있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이어야 하므로,

가장 큰 미덕은, 곧 모든 미덕 중 으뜸은 실존주의자들이 진정성이라 부르고,

낭만주의자들은 신실함이라 부른 것이다. (224쪽)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두 세계 모두의 자식들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낭만주의의 후예들로, 낭만주의는 인류가 여태까지 거기에 맞추어 걸어온 거대하고도 유일한 틀, "영원의 철학"을 깨뜨렸다.

우리는 어떤 의혹-딱 잘라 말할 수 업ㅁㅅ는 것들-의 산물이다. 우리는 결과도 강조하고 동기도 강조하며, 이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226쪽)

 

모든 보편명제들에 대해서도 참일텐데, 만일 이것이 보편명제에 대해서 참이라면 그때는 이것은 모든 언어에 대해서도 참인데,

모든 언어는 보편적이니, 모두 사물들을 분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끔찍한 멍에이며, 끔찍한 폭압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어떤 체계적인 상징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조차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미치게 된다. (슈티르너, 231쪽)

 

파시즘 역시 낭만주의의 후예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비합리적이거나 선택된 소수에 대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또다시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예측할 수 없는 의지, 조직하고 예측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는 의지라는 개념 때문이다. (233쪽)

 

실로 모든 낭만주의 운동은 실재에 미학적인 모형을 부여하고, 모든 것은 예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삶을 예술로 바꾸려는 그들의 시도는, 인간이 물질이며, 그들이 이른바 물감이나 음과 같은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후 낭만주의는 자유주의, 관용, 관대함, 삶의 불완전함을 용인하는 것으로 귀착되며,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자기 이해에 다다른다.

이는 낭만주의자들의 의도와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모든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음을 더욱 강조한 이들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진 셈이다. 겨낭한 것은 한 가지였지만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거의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