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법명은 수혜(修慧)였다. (과거형을 쓴 이유는 때때로 나는 반신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력 없이는 현상유지도 어렵겠다는 스님의 걱정과 당부가 함께 스며있는 법명이었다.
촛불이 일렁이는 철길을 따라 성주사 곰절을 가는 길을 밟아 어머니는 나를 가지셨다고 하셨지만,
이제 나는 거의 무신론자에 넘어 반신론자에 가깝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종종 받은 질문은 불교가 종교인가와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대한 서양인의 궁금증이었다.
사후세계를 주재하고 결정하는 무엇인가가 자기 바깥에, 혹은 사후의 저편에 절대적으로 또 결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서양 문화라고 한다면,
(그것이 필멸의 존재에 대한 작은 위안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주재자가 없거나 혹은 스스로 찾아간다고 보는 것-그 마저도 현실의 지금에서-이
아마도 동양의 도교, 선, 불교 그 쯤이 될 것이다.
(인도의 불교에 대해서도 이러한 동의가 있을 수 있을지 나는 확언할 수 없다.)
육조단경은 드라마틱한 구성의 소설처럼 시작된다. 육조 혜능이 의발을 전해받는 부분은 무협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생활종교로서 자신의 행동을 닦고 실천하여 저편, 피안을 찾아가는 漸敎에서 혜능은 자기 내부의 부처를 단박에 깨우치는 頓敎를 설한다.
로맨티시스트임에 틀림없을지 모를 이 부분은 조심스럽다.
피카소의 입체화 혹은 추상화가 철저한 구상의 뼈대위에 서 있는 것 처럼,
비록 글을 모르는 혜능이 점교의 실천 불교를, 스스로 실천하지 않고서 바로 깨우쳤다고 볼 수 없을 듯하다.
於一切境上不染, 名爲無念 일체의 경계에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 하나니,
於自念上離境, 不於法上念生 자신의 생각에서 경계를 여의면, 법에 대한 생각이 일어남이 없다.
見自性自淨 자기 성품이 스스로 청정함을 보아라
自修自作 自性法身 스스로 닦고 스스로 이룸이 자기성품인 법신-진리의 몸-이며,
自行 佛行 스스로 행하는 것이 불자의 행위이며,
自作自成 佛道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루는 것이 불자가 마땅히 해야할 바다.
內外明徹 於自性中 萬法皆見 一切法 自在性 名爲淸淨法身
안팎으로 미망을 밝혀 자기의 성품 가운데 모든 법이 다 나타나게 되는데,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 법신이라 하고,
從法身思量 卽是化身 법신을 쫒아 생각함이 화신이요,
念念善 卽是報身 생각마다 착한 것이 바로 보신이 며,
自悟自修卽名歸依也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닦음이 귀의라 칭하나니,
......
但悟三身 卽識大意 다만 3신으르 깨우치면 바로 큰 뜻을 알게된다.
海納衆水 合爲一體 (세상을 고루 적신) 물줄기를 받아들인 바다는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한 몸으로 합쳐지듯,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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