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어쩌다 여기까지-울산도시계획평면도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3. 8. 16. 20:43

1943년의 도시계획도면 한 장을 들여다본다.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서의 구실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겠지만,
그보다는 불하할 땅을 팔아 남길 이득에 더 큰 관심을 두었겠지만,
나로서는 이 도시계획도에서 도로의 폭, 33m, 22m, 18m, 15m를 그어둔 스케일이 부럽다.
1943년의 시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고,
(그러한 사적인 계획이 공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저들의 판단도 그러하다. 얼추 10차선을  넘어서는 셈이니.) 
인구 50만을 계획한 스케일 또한 부럽다. (일본의 도시화가 꽤 일찍 시작된 탓도 있을 것이다.)
일본인 헌병대 출신의 기업가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의 매축(埋築, 매립) 계획안이다.
이 계획안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개념적으로 복제생산 된다.
(좀 더 적확히는 당시 일본이 건설한 四日市(욧카이치) 시의 석유화학공업단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모든 걸 그이의 혜안으로 생각하며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사람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일제는 이 당시 이미 조선땅 150 여 곳에 댐 위치를 선정해 두었다. (일본은 1930년 朝鮮水力調査書 전 6권을 발간한다. 그중 주요 하천에는 이른바 다목적 댐이 건설되었다.  그 이전인 1914년 1차 조사 시의 80개소를 확대 선정한 것이다.) 전기와 공업용수로서의 필요에 의해서. 그것도 박정희 시대에 복제된다.  (워낙 긴 시간, 중세의 터널 같은 것이겠고 또) 그이의 시대인 것은 맞겠지만, 그이의 혜안은 아니라는 뜻이다.

(산업입지의 전제조건은 항만가동률이 높고 수심이 깊은 항구, 철도연계, 부지확보의 경제성과 매립재료의 풍부함, 노동력의 공급이 수월하고 용이한 배후부지 그리고 공업용수의 수질과 수량 등일 것이다. 논농사가 먹여 살리는 인구가 곧 인구밀도일진대,  배후에 평야가 있다는 뜻은 산업예비군으로 전환이 상시에 또 낮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일제가 되었든 박정희 군사정권과 재벌이 되었든.)
일제강점기 울산의 사진 한 장이 있어 같이 올려본다.

朝鮮社会経済写真集(善生永助蒐集写真)에서 인용
울산광역시, 울산을 한권에 담다 (2017)에서 인용

얘기가 조금 벗어나겠지만 일제 강점기의 계획도시인 진해의 계획안과 대비시켜 볼 일이다. 도면이 깨어져 확실치 않으나 진해의 도로는 6차선으로 기억한다. (고향이라고 해도 기억은 가물가물.....)

류나래, 히로시마대 박사학위 논문, 식민지시대 군항 진해....에서 재인용

 
각설하고, 이 사람의 사위 이야마(井山安藏, 釜山築港技師長을 지냈다고 한다.)는 일제 강점기에 창녕 남지철교의령 정암교(한국전쟁 중에 일부 소실되었다고 한다.)를 설계한다. (감독한다가 맞는 표현일지도)  남지철교는 아름다운 곡선의 트러스교로 리벳 이음을 하고 있는 수(手) 제품이다. 따끈따끈한(?) 리벳을 달구어 위로 훌쩍 던져 올리면 위에서 받아 연결구멍에 넣고 반대쪽을 때려 리벳머리를 만들게 된다. 묘사는 아름다운 수작업이지만, 상당한 노동자의 숙련 혹은 신체의 손상을 담보해야 한다. 남지 철교의 이 트러스교는  간결한 철구조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수탈에 기여한 기술자의 작품이긴 하다만. 보이는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추악한 약탈과 수탈의 그림자가 함께 짙다. 

남지철교 가설전의 끌배 교통;朝鮮社会経済写真集(善生永助蒐集写真)에서 인용

 

문화재청 자료에서 인용,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69274&ccbaKdcd=79&ccbaAsno=01450000&ccbaCtcd=38
1932년 일본토목학회지에 실린 남지철교 전경 사진
1935년 일본토목학회에 실린 정암교 전경사진
2019년 일본토목학회 논문집,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도로건설사업"에서 인용, 정암교 시공사진

의령일보의 기고문에 따르면, 1930년 전후 경상남도의 토목관료들은 일본 攻玉社 공고 출신 등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정암교 설계 당시 경상남도의 토목과장은 우에다 마사요시(上田政義)이고, 당시 그는 츠노다(角田), 이야마(井山) 등 고교 후배들을 불러 경남의 주요교량 공사를 맡겼다. 남지교 1932년 12월, 낙동교 33년 1월, 적포교 35년 7월, 정암교 35년 5월 등은 이들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한다.
고교 후배라고는 하지만 일본 토목학회지에 보고를 낼 수준이고 보면 단순히 한국식으로 후배를 불러 공사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1930년대에 저만한 트러스교량을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이란....일본이 開國을 먼저 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모습들을 볼라치면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국근대화의  한 시절에 대한 생각과, 기술을 천시하고 있는 그때나 지금이나의 현상과,  땅값에만 몰입하고 있는 지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나의 만감은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