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밀히 박정희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절에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러저러한 신화의 시대를 겪기는 했었다.
이제 그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한 마디쯤은 하고 넘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온 것만은 또한 분명하다.
1. 모든 신화는 한 인간에 대한 시간축적의 산물이다.
박정희의 독재가 짧았더라면 그 신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왕정시대가 아닌 다음에야.
밤에는 씨바스리갈을 마시더라도 (이 술에 대한 평가만은 나와 일치한다. 소주 같은 쌉쌀한 맛이 있긴 하니까.)
낮에는 논두렁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 그것이 곧 신화가 된다.
(오랜 기간이라면) 모진 인간일지라도 때때로 사람처럼 보이는 순간 때가 있다. 어쩌다 한 번 쯤은 청춘의 소년같은.
기간이 길면 길수록에 이러한 신화는 쉽게 만들어진다.
(한 마디 툭 던진 말도 신화가 된다. 온갖 얘기를 했을 터인데,
그 중 좋은 예와 새로이 해석될 법한 사례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작은 것들도 큰 그림의 프레임에 녹여내면 시간축적의 결과로 장기간에 걸쳐서는 신화가 된다.
(대기업 회장의 신화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도 오랜시간 군림했기에.)
설사 그 사람이 독재와 억압으로 뭉뚱그려진 인간일지라도.
자기 시대의 최고 권력자와 술잔을 기울인 노인들과
그 모습에 어이없이 감동받는 노예근성 인간들의 입소문에서. 이른바 확실하고도 싸게 먹히는 구찌 마케팅이다.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그러한 막걸리 자리를 함께 했는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시간의 축적은 타인의 업적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킨다. 포항제철이거나 경제개발 계획이거나 다른 어떤 것들도.
그 당시의 일이긴 하나 적확히 그이의 업적일까는 의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자주 또 반복하여 들어서) 기억하는, 그이가 없었다면 되지 않았을 것이다에 매몰된다.
이러한 시간의 축적은 Side Effects 조차도 신화로 둔갑한다. 그린벨트가 그 예일지도 모른다.
삼림 녹화는 기대치 않게 얻어진 부수 효과이고, 이제 그것은 시대를 앞서본 그이의 눈으로 환치된다.
그리고 잘된 - 시간의 효과에 의해 윤색된 - 사례만이 남아 그이를 신격화하는데 이용된다.
짧은 4년 대통령의 신화가 드물다면 드문 이유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보여지지만, 신화가 목적도 아닐뿐더러 목적이 되어서도 아니 된다.
2. 경제신화, 그것은 시절의 산물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 시절을 견디어낸 공밀레에 대한 모욕이다.
자신의 살과 피를 갈아 넣어 한 시절을 일구어낸 우리의 부모님들에 대한.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세계전략 (냉전의 아시아 전선)과
일본의 산업이전 (공해산업을 이전하기 위한 환경문제 해법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차적인 나의 생각이다.
혹은 당시 일본의 임금과 생산성에 맞지 않는 단순 조립공업 등에 대한 이전일 수도. 좀더 확장해서 보자면 아시아적 산업의 재분배의 한 방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임금에 기반한 (혹은 저임금을 방조하거나 유도한 농촌의 해체와 산업예비군의 증대에 기반한) 재벌과의 결탁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에 대한 그 좋아하는 '사실적'인 확인 혹은 질문만 던져보면 알 수 있을 터이다.
- 같은 시기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물론 대만의 종잣돈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10%대가 대단하다고 한다면 브라질이나 멕시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 한국사회의 관료와 재벌의 혼인 관계는? 혹은 귀족들의 혼인관계는? (최근의 논란에서 보여지듯 9급 공무원은 관료에 들어가지 않는다. 조선시대 음서를 제외하고 과거 급제자가 년 30명 수준인 점을 비추어보면 관료, 혹은 문벌 귀족의 정의가 명백해진다.)
- 토지에 기반한 계급의 상속은?
나의 천착은 그 어느 쪽에도 더 깊이 다가가긴 힘들지만,
나의 심적 확증은 합리적 의심에서 (편향이라 불러도 좋다.) 출발한다.
그리고 저만한 성장의 이면에서 살과 피로써 갈려나간 모든 공밀레들이 있다. 불평등과 분배의 불균형 속에서 버티어내신.
결론적으로 '그의 시대'와 '그'를 동일시하는 현상이 '신화적' 현상일 것이다.
3. 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치부책
식민지는 침략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부적인 부역자들에 의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내부적인 부역자가 없다면 침략이 곧 전쟁이 될 터이나, 조선에서의 마지막은 그러한 여정을 부분적으로 뛰어넘었다.
물론 동학 농민 전쟁이 있긴 했지만. 부분적이었거나 일부였을 것이다.
노예근성에 찌든, 부역자의 편에선 대부분의 귀족과 관료와 상업자본, 그리고 밑에서 허덕이는 민초들에게서는.
(그러한 근성은 만들어진 단어일 수 있지만, 그러한 현상은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터이다.)
박정희 신화 역시 그러한 친일 부역의 시절을 재생산하며 다시 재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출신이나 과정이나 실재를 본다면.
(그럴 경우 적이 필요하고, 그 적은 빨갱이로도 충분했다. 지금의 중국을 쳐다본다면 원조 빨갱이의 모습과 저 너머 빨갱이의 모습을 대비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
친일파가 살아남기 위해 (솔직히 그럴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미 친일의 세상이었으니.)
친일파에 가깝거나 적어도 우리 편이라고 믿어봄직한 한 권력자를 내세웠거나 동의했거나.
그리고 그는 원죄가 있으면 더욱 좋다. 자본에 의한 조종이 가능한 인간일수록에.
이제 박정희는 친일파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되, 계급의식을 잃은 노예들에게는 금새 숭모하는 대상으로 굳어간다.
(엄밀히는 숭모의 대상으로 만들어진다.) 왕이 필요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기제에 의해서.
메이지 시대 일왕을 천황으로 신격화시킨 모델 그대로.
아니 부역자들은 자기가 가진 관료적 지위와 토지와 귀족적 계급의 유지를 위해서.
원래 친일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신화는 되먹임 되고 왕의 신화로 증폭되고 재생산된다.
원래도 부역의 한 축이었던 언론의 되먹임과 군국주의의 교육의 확대 재생산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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