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내 고향 진해(鎭海)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3. 8. 30. 08:38

정치인들의 놀음에 지금은 창원(昌原)에 묶여 버렸지만, 진해는 진해이다.
1786년  일본의 지도에서 진해와 진해만의 위치는 오늘날과는 차이를 보인다.
(정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진해의 위치가 어디인가 아니고 이 시기에 일본이 이 정도의 지도를 출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국이 빨랐다고 한다손 치더라도, 실질적으로 국제적인 -혹은 엄밀히는 제국주의적인-시각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즉 창원부를 지나 서쪽으로 함안과 고성의 사이, 진해만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지금의 진동, 진북, 진전면을 "진해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1786 朝鮮国全図 (林子平図 須原屋市兵衛)

 
몇 년 뒤인 조선의 1861년 대동여지도의 진해군 역시 그러하다. 정작 지금의 진해는 웅천의 위치이다.
어느 바다인들 통하지 않으련만, 일본군항으로서의 진해만은 역시 진해의 이동과 더불어 옮겨진 진해의 전면으로 배치되는 형국이 된다.
 

1861 대동여지도 부분

일본의 한반도 지도 출간 기록으로 운양호 사건이 발발했던 조선 고종 11년, 1874년의 다음 지도를 보면 대륙침탈의  기초자료로서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1874 大日本及支那朝鮮国全図 (宮脇通赫)

1910년부터 시작된 진해 일본군항의 건설로 일제강점기 1912년 진해시가 발전예측도는 이렇게 묘사된다. 우리가 중원로터리라고 불렀던 방사상의 도시계획은 중원로터리 중앙의 당산목인 팽나무를 살려두었다는 측면에서는 딱히 전범기를 모사하였다고 하기 어렵고 유럽식의 방사상 도시계획이라는 반론이 있으나, 일본 측의 자료(1930, 조선의 도읍)에는 "욱광방사상旭光放射狀"이란 표현이 있고 보면 전범기의 모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대신에 조경개념이 있었던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방사상의 축선의 배치와 도로와 철도, 더불어 차선의 배치나 차로의 폭이나 하는 측면에서는 더욱. 식민지 군항의 소위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일 것이다.)

 

鎮海大市街建設之現況, 식민지배를 그리워하는 일본인의 한 사이트에서 인용. 이런 자료가 일본인들의 식민지에 대한 향수와 관련되어 올라와 있는 것은 되새겨 볼 만한 대목이다.
1912, hanauction.com에서 재인용

이 시기 일본해군은 약 11만주의 벚꽃을 식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벚꽃은 옛 일본해군, 현 해상자위대의 상징이다. 앵커에 벚꽃이 걸려있다. 사실 일본의 어느 단체인들 벚꽃을 상징으로 삼지 않았겠냐만), 1920년대에 이르러면 진해는 벚꽃장(場)이 서는 동네가 된다. (물론 일본인들이 주류였겠지만.) 벚꽃에 대한 내용은 다른 포스팅에서....

 

1922, 朝鮮之風光 (南滿洲鐵道株式會社京城管理局 編 )의 진해시가
1930 朝鮮の都邑(조선총독부), 진해 항목

 
 
 
 

1932년 釜山案內 팜플렛 상의 진해시가 모습, 중앙의 팽나무와 오른쪽의 경찰서 (혹은 조선상업은행 지점 건물?), 아랫쪽의 현 우체국 건물이 보인다.

 

1931년 조선항만요람에 실린 진해항의 평면도이다. 속천 쪽에 잔교 pier가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진해거제 여객터미널 자리와 해양경찰서 진해파출소 자리쯤이다. 지금은 매립된 작은대섬과 큰 대섬이 보인다. 지도의 왼쪽 상단에는 두 곳의 방사상의 로터리가 배치되어 있다. 이 배치의 기록은 1912년의 시가도에도 확인된다.

1931 朝鮮港湾要覧 (朝鮮総督府内務局土木課)

 

바다와 관련하여 진해 역시 해수욕이 가능하다고 당시 여러 여행 안내서들이 말하고  있지만, 사진상의 기록은 1911년 마산항의 해수욕장이 남아있다. 사진은 합포만?으로 보여지지만  진해의 사정도 딱히 다를 바 없었으리라 추정된다.

1911 釜山鴨緑江間写真帖

Post Blogging Notes: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불편했던 진실 하나는, 

우리는 이러한 자료를 스캔본으로 올려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자료의 대부분은 일본국회도서관에서 가져왔다.

(내가 한 때 계약직으로 있었던) 국토(개발)연구원에서조차 국토개발과 관련된 스캔본은 없거나 외부 비공개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그러한 모습은 학문적 이기심을 넘어 배타적이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런 현실에서 관심이 학문으로 진전될 리 없고, 자생적으로 연구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일본이 이를 스캔한 이면에는 식민지의 향수가 어려있을 수는 있다. 

혹은 조선을 개발시켰거나 근대화시켰다는 의식이 깔려있을 수 있다. 

개인의 향수는 어쩌지 못할 부분이라고는 하나, 국가적 향수라면 이는 제국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 친일파 역시 이러한 개인적 향수를 (혹은 가문적 향수이거나)  조직적으로 상속시킨다는데 주목해야 할 것 같다.

환수되지 못한 친일자산의 상속과 더불어.

 

하나 더. 일본의 이 스캔본들에서 그들이 조선 땅에서 저지른 범죄의 증거나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한 개연성은 합리적 의심의 범주에서 당연하고도 타당하겠지만,

자료로서 확인하기는 힘들다.

이런 부분들이 기술적 자료들의 스캔본들이 올려져 있는 이유의 하나일 수도 있다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