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여지껏 잘못 읽은 시조 한 편 - 누군가에게는 밝아지지 않을 동창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1. 9. 4. 01:06

조선 숙종조 남구만이란 이가 쓴 시조이다.

나로서는 그가 조선인의 삶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여, 그의 시조가 교과서에 실린 연유도 알지 못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놈은 상긔아니 일었느냐

뒷 뫼에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하나니.

 

철저하게 양반의 입장에서 종놈의 게으름을 탓하는 내용이다. 

 

새벽녘이 어느새 밝아 종다리가 우짖는데,

소치는 아이 놈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고개 너머 이랑 기다란 밭은 언제 갈려고 하느냐, 는 내용이다.

 

여기에 당파싸움을 비틀어 보여주고 있다는 민초의 삶과 괴리된 설명이나,

전원생활(?)의 평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교과서적 설명은

다분히 양반네들의 자기만족이나 당대의 현실을 왜곡한 데 불과하다.

 

소를 꼴 먹이고도 모자라

고개 너머의 마름들의 밭까지 갈아야 하는

처절한 아동착취와 노동 착취가 보여질 뿐이다, 이 시조는.

'놈'이란 표현에서 이러한 양반들의 세계관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부 인용에서는 '놈'자 마저 빠져있어 왜곡에 일조한다.)

문전옥답은 아마도 어른 종놈의 몫일 터이고,

(부모는 벌써 논을 써레질하고 있을지 모른다. )

고개 너머의 마름들의 세경 밭은 아이 종놈의 몫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조는 군더더기 없이 '사실적'이며,

착취당하고 닦달당하는 민초들의 서글픈 새벽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고개 너머의 밭두렁까지 챙겨내는 양반들의 욕심과 서슬이

이 시조에서는 무서우리만치 고스란히 보여진다.

 

이리 가슴 아린 시조를 잘못 읽히는 데에는

양반들의 세계관이 지배계급의 세계관으로 굳은 데 있을 것이다.

(간단하다, 저런 노래?를 통하여 누가 이득을 얻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현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몰노동적으로 이해하는.

 

누군들 노동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자가 있겠는가, 

한국의 현실이 저 상황에서 어느 정도 나아졌는가는 여전한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