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조홍민 옮김, 글항아리
일본의 무사, 그렇게 적고 양아치라고 읽는다, 계급(?)이 자신들의 문장으로서 식물을 차용한 것은 경이롭다.
개싸움 같았을 전장에서 피아를 구분하고 처절한 도륙을 목적으로 상징적 문장을 내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의 시각에서도 충분히 현대적이다. 요컨대 상징화와 단순화의 정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에 동의한다.
그렇게 집어든 책,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은 실망스러웠다.
우리로서도 자국 중심주의의 협소함에 매달려,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판단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저자의 시각은 국수주의를 내세우진 않았지만 편협하고 폐쇄적이며 총체적인 사고가 아쉬웠다.
연작이 불가능한 밀농사와 그 생산성이 만든 유럽의 풍경이나 장원과 대비하여,
벼농사가 만든 에도의 풍경은 그것이 일본적인 경험이나 선인들의 지혜가 아니라,
장마나 범람에 의한 토양의 염분 제거와 유기물 유입으로 연작이 가능했던 무논의 풍경이기에,
자연적인 현상이 빚어낸 일본의 풍경을 지나치리만치 일본적 지혜로 미화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인분의 퇴비화를 자연 발생적인 경험의 소산이 아니라,
일본적 지혜의 리사이클링이라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실소를 넘어 지나친 생태환원주의적 해석을 경계하고 싶어진다.
(그때는 그렇코롬 되어있어다, 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실제적이고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교육이 일본의 문화는 한국에서 전래된, 되었을 것이라는 주입의 탓이 클지도 모른다.)
일본의 외래문물을 서양과 직접 연결시키려는 저자노력은 동아시아의 지리적 위치를 감추고
세계속의 일본으로 유럽과 동일시 하고픈 저자의 꿈은 그 노력은 가상하되 또 가소롭다.
정작 내가 보고자 했던 사무라이 가문(?)의 문장에 대한 내용은 빈약하다.
깊이는 없고 나열만이 있는 블로그 수준의 기술이 아쉬웠다.
다만 아욱으로 알던 3잎 문장이 제비꽃 잎이 맞는 번역일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제비꽃잎이 있긴 하니까.
해도 그런 단순함의 미학을 추구했던 그네들의 감각은 높이 사줄 만하다.
어느 경우에나 단순함은 모든 복잡함을 이기고 살아남는다.
뚱단지 같지만, 그런 일본의 가문 문장을 베낀, 원래가 없던 그것으로서의 한국의 가문 문장은
얼마나 처참하며 몰미학적인가? 책을 덮으면 한 생각이다.
P/S
나일강의 범람이 무엇을 뜻하지를 늘 알지 못하였다.
농사란 땅속의 비료성분을 식물이 빨아들이고, 토양에는 잔류 염화물이 남게되는 과정이다.
범람을 통하여 상류의 토사와 비료성분이 유입되고,
이 범람을 통하여 상부 토양의 잔류염화물은 깊은 지중으로 빠져나가고 결과적으로 농사짓지 좋은 땅이 된다.
(장마 역시 동일한 기능과 효과를 보이는 셈이 된다.)
밀의 연작이 불가능했던 유럽과 달리 이런 범람을 통하여 나일강 유역은 밀의 연작이 가능한 곡창지대가 되는 셈이다.
벼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벼는 특이한 식물이다.
무논에 물대기를 통하여 벼는 땅이 아니라 물 속의 영양분을 흡수한다.
이른바 수도작은 잡초를 제거하는 효과도 있다.
(결국 씨알 한 단위가 소출되는 효과가 밀과 비교하여 현저히 크다.)
지중으로 스며드는 물은 잔류염화물을 지중으로 끌고 내려가 상부는 늘 새 땅이 된다.
연작이 가능한 프로세스이다.
이는 관개수로라는 시설을 필요로 하지만 장마도 한 몫을 한다.
결국 땅과 곡물은 감당할 수 있는 숫자의 인구를 먹여 살린다.
동아시아의 인구 과밀은 상호적이긴 하지만 벼의 재배와 연관되어 있다.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은 밀의 재배가 만든 풍경이며 인구밀도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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