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1) - 교린交隣, 소중화의 주자 이데올로기로 주변국을 멸시하고 달래어...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7. 00:17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강진아 번역, 소와당 講談社 2009

 

절판되었다. 하는 수 없이 도서관의 책을 빌려 읽는다. 책이 나온지는 좀 되었지만, 나의 시원찮은 기억력을 핑계삼아 여전히 새롭다고 느끼며 읽어간다.

 

우선 책의 제목이다. 나로서는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어서인지, 그 기획이 조선인의 기획이 아니라 일본인의 기획으로 오해했다. 자주성이야 차치하고, 조선의 독립에 있어 일본인의 기획이 어떻게 작동하였는지, 혹은 일본인의 기획 아래에서 조선이 어떻게 독립하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이 책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나 이 책의 원제는 <世界のなかの日清韓関係史 交隣と属国、自主と独立>이다. 요컨대 그것은 한국과 청 그리고 일본의 관계사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독립도 그 독립이 아니다. 獨自 정도가 맞는 느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종번(宗藩)에 대한 나의 관심의 일단을 해소할 만한 기회라 생각하여 읽기를 계속한다. 

 

***

1. 종속관계

1-1. 조선왕조의 대외 관계 

 

(27쪽) 조선왕조는 ...명(明)이 구상하는 세계관, 세계질서에 가장 충실한 나라라고 해도 좋을 법했다. ...(28쪽) 중화를 에워싼 주변국가들은 그 천명 (하늘로부터 천하를 지배하도록 명을 받은)을 존중하여, 신하로서 명 황제를 섬기고 복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주변국의 행위를 조공(朝貢)이라 하고 명의 행위를 책봉(冊封)이라 했다....일본의 경우 주로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 조공이나 책봉을 받은 것으로 이른바 복속이나 조공은 그 방편에 불과했다. ...

    (29쪽) 거의 유일하게 달랐던 것이 조선이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이 주자학의 이념, '예제' 禮制의 질서에는 거의 관계도 없고 아는 바도 관심도 없었던 것에 비해 조선왕조는 주자학을 나라의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명의 세계관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여 ... 명을 군주와 아비(君父)인 종주국 宗主國으로 (30쪽) 숭앙하며 스스로 신하와 자식(臣子)인 번속(藩属)의 지위에 기꺼이 머물렀다. 이러한 관계를 종번(宗藩) 관계라고 부르는 것...사대事大관계이다.

   (30쪽) 이들 (여진과 일본 등) 이웃나라에 대한 조선의 태도는 역시 매우 독특했다. 인접한 (31쪽) 이상 ....관계를 맺긴 했는데, 이를 교린交隣관계...이웃나라와의 교제라는 의미이지만...중화 그 자체였던 명에 대해서는 스스로 동이 東夷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중화의 분가 分家임을 자임하며...주위에 있는 일본, 류큐, 주션 등은 문자 그대로 이적 (夷敵), 야만(野蠻)...이라고 멸시하고, 사람이 아닌 금수를 적당히 달래둔다는 것이 그 이념과 심정에 가까왔다. 

   (32쪽) 조선의 대외 관계는 ....사대는 명에 대해서만 적용하는 관계이며...일본과의 교린이라면 일본에 대해서만 적용되어...때에 따라 각각을 따로 구사하면서 또 각각을 묶여서 의미 부여하는 것은 바로 조선왕조 자신이었다....바꾸어 말하면 동아시아 각국 전체를 규율하는 공통의, 예를 들면 근현대의 국제법과 같은 관념이나 질서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1. 종속관계

1-2. 왜란 

 

   (33쪽) 동쪽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많은 나라로 나뉘어 뭔가 소란스러운 것 같은 토지, 이것이 고대 중국의 일본관이었다. ...전세계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와 영향 아래 있던 (34쪽) 시기에 그 정복을 면한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율럽과 동쪽 끝에 있는 일본뿐...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지 모른다. 근대에 자본주의화가 가능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 동서의 양 끝뿐이었으며 그것은 유라시아 대부분과 일본, 유럽이 상이한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36쪽) 때는 바야흐로 16세기, 신대륙의 발견과 서세동점의 대항해 시기...은이 갑자기 증산되어...풍부한 귀금속을 매장한 일본열도는 역시 (마침 구조개혁을 이루고 경제발전을 시작하고 있었던 활성화된) 갑작스럽게 중국의 주요한 무역상대로 등장하여...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센코쿠의 군웅쟁패이고 오다 노부나가.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이다. 할거와 항쟁으로부터 이윽고 통합으로 수렴해가는 국내의 부력, 무력의 증대는...(37쪽) 중국해로의 팽창으로...이른바 후기 왜구가 그것이다.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왜구라는 해적행위는 종식되어도 에너지의 분출은 그치지 않았다. 그 종착역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 (임진왜란)이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정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에 넘어가,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에도 막부를 열게 (된다).

   ...(38쪽) 원래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조선 측에 문제의 소지가 하나도 없었다고 할 수 없던 것이) 조선왕조는 문인 우위의 정연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로, 유교 주자학의 테제 그대로 무를 비하하는 관념을 상하 모두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군사력은 상대적으로보아 그다지 막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외적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사대관계, (39쪽) 교린 관계가 나름대로 잘 기능하고...말하자만 뛰어난 외교 덕분이었다. 

 

    신숙주, <해동제국기>, 1443

    (일본은) 습성은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의 조정에도 능숙...그들을 달래는 데 그 도를 얻으면 朝聘의 예를 갖추지만, 그 도를 잃어버리면 함부로 노략질을 한다. 

 

(40쪽) 이리하여 16세기 말에 이르러스는 오로지 명분에만 구애되어, 당시 일본의 실정, 센코쿠 시대에서 토요토미 정권에 이르는 상황변화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조선출병을 당해서도 쓰시마의 무네우지 가문이나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한 교섭만 고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보인 자세 (달래는 데)는 전쟁의 참화를 당한 뒤에도 유감스럽게도 변하지 않았다. 조선은 약 30년후 다른 국면에서도 반복하여 '왜란'과 마찬가지의, 아니 그 이상의 재앙을 자초하게 된다.

 

(41쪽) 일본의 공격을 받은 조선은 명에 원군을 요청...번속의 위기는 상국이 구조한다는, 다른 말로 하면 교린 관계의 파탄을 사대관계로 구제하려고 한 것이다. 각각이 별개의 것이었던 대일, 대명 관계는 이 시점에 와서 불가분의 관련을 맺게 되었다. ...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명일(明日)전쟁으로 바뀌었다...따라서 그 결말여부도 명과 일본의 교섭에 맡겨지게 되었다.

...일본군은 해상에서 조선 수군에 패배...새로 등장한 명군에 눌려...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 사이에 강화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다....이 강화 교섭의 의미도 파악하기 어렵다. ...일본을 명이 구상하는 세계질서 속에 포함시킬 것인가 (명 내부의 토론은 즉, 토요토미에 대한 책봉, 조공의 허락 등) 말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42쪽) 토요토미의 기본방침은 조선이 일본에 복속하여 명 정복의 선도를 맡는다는 것이었으므로...

....어쨌든 명과 일본의 강화가 파탄을 맞이하고, 양자가 서로 양보없는 전쟁을 재개하자, 이제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바로 전쟁을 기획하고 집착한 히데요시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수 밖에 없었다. 

...(43쪽) 조선 정부의 고민은 ...대항해시대 이후에 발흥안 나라로 조선과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군사적으로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국토를 유린당한 조선정부의 사활을 건 문제였으며, 동시에 인접한 중국을 통치하는 왕조의 중대한 문제였다. 

 

***

조선이란 나라를 가문 연합체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 일본인이 기술한 국제관계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일정 부분 그 논의와 통찰을 인정할 필요는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