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2) - 오랑캐 夷도 중화中華가 될 수 있다는 세계관의 도래 17세기초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8. 00:45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강진아 번역, 소와당 講談社 2009

 

1. 종속관계

1-3. 호란

 

(45쪽) 당시(명 후기, 북방 초원의 몽골과 남방해안에서의 교활한 왜노 倭奴의 위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화 華'와 '이 夷'룰 준별하여, 사람과 땅을 나누어 차단하는 것이 명의 이데올로기이며 대외 체제였다. 길고 긴 해안선에 실시한 해금 海禁과 지금도 남아있는 장대한 만리장성은 그러한 분단 分斷을 물리적으로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와 행동은 16세기 세계적 규모의 은 유통과 이로 인한 중국 사회경제 활성화는 추세에 역행하여, 시대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 되고 있었다. 

 

(47쪽) 명의 북변과 연해,화이 華夷를 분단해야 할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에는, 이러한 화이 일체의 무장상업집단을 중핵으로 하는 공동사회가 형성되고...다음 세대를 짊어질 세력이 탄생한다. 그것은 북로도 남왜도 아니었다. ...여직 女直 (여진) 사람들, 즉 요동지역의 주션 (만주어로 여진족)이다. 

 

(48쪽) 조선으로 흘러들어간 일본 은은 견직물 및 면직물 등 중국물산의 구매에 소비되었으며, 그 물산 중 일부는 은의 대가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수출국인 중국은 물론 이른바 중계의 위치에 있던 한반도는 무역의 이익을 입어, 그것이 주션 특산품(인삼,진주, 담비가죽 등)의 수요를 낳았다. 

...16세기 후반에 이르자...명에서 북로北虜(몽골)의 (49쪽) 군사적 위협이 증대되고, 밀수는 점점 활발해지는 가운데, 요동의 변경에서도 무장상업집단의 활동이 두드려졌다...상업에 의존하는 대규모 군벌이 연이어 흥기...명의 변장 邊牆과 압록강 사이에 끼어있던 땅을 본거지로 한 건주의 누르하치, 훗날 청 태조라고 불린 인물이다.

 

(51쪽) (누르하치의 세력을 허용하여 안정된 교역의 창구로 해두는 것이 낫다고 보았던 명의 서쪽 당국자인 대장군) 이성량 세력도 누르하치의 만주국도 변경의 상업 붐에 편승하여 나타난 것으로...화이 혼성의 무장상업집단이며, 당시는 양자가 변장의 안팎에서 공존하는 태세였다. 그런 와중에 발생한 것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 (임진왜란)이었다. ...(52쪽) 명의 출병에 수반하여 막대한 인원, 물자가 이동한 경로였던 요동지역이 한층 경제적으로 활기를 띠게 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53쪽) 누르하치의 ...전반 30년간은 명조와 협조하여 주션 통일에 노력한 시기이고, 후반 10년은 명과 공공연히 적대관계를 이루게 된 시기...전반기는 자신의 나라를 만주라 부르고, 후반에는 특히 대외적으로 아이진 (만주어로 금 金, 13세기 금과 구별하여 후금 後金)이라 칭했다. ...1616년 그 군주인 한(汗, han)에 즉위하여...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을 대파하여 승리를 거두어...(54쪽) 명과 조선 사이에 이념과 질서를 달리하고, 게다가 군사적으로 우세할 망정 떨어지지 않은 일대세력이 개입하게 되면서 (명과의) 종번관계도 원활히 지속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광해군이었다. 조선은...명에 대한 예를 유지하면서도 아이진과 우의를 (55쪽) 유지하려고 신경을 썼다. ...누르하치도 조선이 명에 협조한 것을 추궁하지 않았다....(56쪽) (누르하치가) 명과 대립을 계속하는 이상, 이쪽 저쪽 눈치를 살피고 있는 조선을 강경하게 만들어 아이진과 적대관계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623년 광해군을 폐위하고...조선은 아이진과 관계유지에 애썼던 정권에서 양이攘夷를 표방하여 아이진을 적대시하는 정권으로 바뀌어....확연히 전면과 후면에 적을 둔 형세가 되었던 것이다.

   1627년 홍타이지가 즉위하자...이러한 형세를 타개하기 위해서...조선으로 출병 ('정묘호란')...아이진은 압도적 우위에 서서 '형'으로서 아이진을 모실 것, 아이진에 병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 등의 조건을 조선에 받아들이게 하고 강화했다. 

 

1. 종속관계

1-4. 화이변태 華夷 變態

 

(58쪽) 아이진과 조선의 관계는 정묘호란으로...양자 모두 '형제' 관계로 표현했지만...이처럼 친족, 혈연관계에 가탁하여 쌍방의 군주, 국가관계의 성격을 나타내는 방식은 이때까지도 동아시아에서 행해졌던 것이다....이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할 수 없는 경우 어찌 되었든 평화를 유지하여 공존하는 관계를 상징...(59쪽) 관계의 내용은 역시 당사자 각자의 이해와 세력균형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이진의 강화 조건에 대해 조선왕조 실록은) 명과의 관계 단절요구는 대의가 걸린 문제이므로 결코 용인할 수 없다. 형제라는 명분은 다투지 않아도 좋다. ...(60쪽) 일찍이 예의로 알려진 나라이다...사대와 교린에는 각각의 도리가 있다. 지금 귀국과 화친하려고 하는 것은 교린에 따른 것이며, 명을 섬기는 것은 사대에 따른 것이다. 양자는 동시에 행하여도 모순을 일으킬리 없다.

 

(62쪽) 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국으로 ...청의 성립...(홍타이지가) 새로 정벌한 것은 몽골과 조선인데, 몽골이 나서서 홍타이지를 (63쪽) 황제로 추대하려고 한 것에 비해, 조선은 전혀 관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교적 이념으로 황제는 천자로 천명을 받은 존재이므로 ) 조선의 추대없이 대청국 황제에 즉위한 홍타이지는... 1636년 조선에 출병한다. (병자호란)...(64쪽) 청의 건국 황제 즉위와 함께 고려해본다면, 병자호란은...조선 자신이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사대관계, 나아가 명이 고집해온 질서 체계 그 자체를 바꾸려고 한 도전이었다. ...(66쪽) 청의 입장에서 보자면, '형제'관계라고만 해서는 조선을 명에서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없었다....황제추대를 하지 않으면 실력행사, 이리하여 병자호란이 현실로 되었다.

...1637년 홍타이지가 조선에 강요한 조건은, 명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과 사대관계를 맺을 것, 연호의 (조선의 공식문서는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음) (67쪽) 사용을 포함해 그 조공, 의례의 수속 일체는 명과의 구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청과 조선의 관계는 명대와 똑 같은 종번 관계가 될 수 없었다. 조선의 왕세자가 인질로 심양에 억류되고, 세폐歲幣의 부담이나 명 공격의 원조를 강요당하는 등, 조선에게는 가혹한 것...명과의 종번 宗藩관계와 구별해 종속 宗屬 관계, 조선은 계속해서 번속藩屬이라 부르지만 본서(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에서는 속국屬國이라 칭하기로 한다.

 

(68쪽) 조선 출병 (임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직후에...정지가 부족한 쓰시마는 조선과의 중계무역으로 생계를 잇고 있기 때문에...조선 쓰시마간의 통교, 무역의 규정을 체결하고 (기해약조)...도쿠가와 정권과 조선 사이에 서서 양자가 주고받는 국서를 (69쪽) 바꿔쓰는 (改竄), 혹은 위조하는 방법으로 조일관계를 수복시켜...위조의 대상은 도쿠가와 쇼군의 국제적인 칭호였다. ...조선은 군주가 국왕으로, 종래부터 대등한 교린 관계에 따라 '국왕'의 칭호를 명기한 국서가 아니면 수리할 수 없었다. ...일본은 신하가 '국왕'이라고 쓰지 않는 선례 (천황에 대해서 불경, 중화 왕조에 대해서는 비굴하게 보인다는 이유로)가 있었다. ...과연 20년 뒤 국서 위조가 드러나고...(70쪽) 조선과 일본의 통교는 무역을 둘러싸고 일상적인 것을 쓰시마번이 담당하고, 국가규모의 것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막부가 직접 담당하는 체제가 굳어졌다. 도쿠가와 쇼균의 칭호가 '대군 大君'으로 정해진 것도 ...1635년에서 이듬해에 걸쳐서의 일이다.

 

(71쪽)...1644년 명은 유적 流賊 이자성의 공격을 받아 어이없이 멸망하고, 곧이어 청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 수도를 정하고...이 명청교체를 일본인은 '화이변태 華夷變態'라고 불렀다. 중화의 명이 이적인 청으로 모습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夷가 화 華를 대체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세계 질서의 전환이었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것은 중화가 이적이 되어버렸거나 혹은 이적이라도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낳아, 동아시아 세계관을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72쪽) 놓고 각 종족에 일종의 내셔널리즘을 안겼다. 그것이 청.조선.일본의 지배 이데올로기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새로운 시대의 질서 형성을 촉구하게 된다.

 

(73쪽)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쳐...일본 열도와 요동지역이 발흥했던 ...그 사이에 끼어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증대한 것이다.

   한반도가 16세기 말에는 남방에서 17세기 초에는 북방에서 연속하여 유린당한 사실이 그러한 사정을 무엇보다도 웅변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