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3) -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조공을 하고 있을 뿐 국사는 자주(自主)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9. 00:03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강진아 번역, 소와당 講談社 2009

 

2. 속국 자주의 형성

2-1. 서세동점 (西勢東漸)

 

(77) 교린관계의 구조...17세기 중반 동아시아에 성립한 새로운 질서체계의 존속기간은 조선에서는 조선 후반기,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중국에서는 청의 시대로 마침맞게 겹친다. 각각의 정권은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안정되었으며...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대등한 교린관계가 있었다. 무역을 둘러싼 일상적인 통교는 오로지 쓰시마 번과 조선의 동래부가 담당하고, 정권 차원에서는 조선 통신사가 부정기적으로 일본에 와서 에도막부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79)...조일의 통교가 실질적으로는 쓰시마 번을 매개로 하고, 또한 조선에서 오는 극히 한정된 일방적인 통행밖에 없어서, 서로의 실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도쿠가와 정권이 사용한 대군 大君이란 칭호는...조선에서는 신하에 해당하는 직명이지만, 일본에서는 제후의 장을 의미했다. ...이에 조일 쌍방은 그 어휘에 대해 자기 형편에 좋게 해석을 붙이고 있었다.

 

(80) 이익, <성호사설 유선 星湖僿說 類選>

최근 점차 (일본에서) 충의지사가 나타나, “명분을 바로잡고 언어를 순화하니 (正名順言) 언젠가는 반드시 힘을 얻을 것이다. 만약 이인夷人과 연계하여 천황을 옹립하여 제후에 호령시킨다면 대의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르고...(81) 이와 같은 사태에 이른다면, 상대쪽 (일본)의 원수는 황()이고 이쪽은 왕 이 되니...관백 官伯(일본국서의 대군 大君)이 국왕임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되고 말았다.

 

(82) (청과 조선사이에는 종속관계가 있었고) 그래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이전에 종속관계를 처음 맺은 조선은 역시 특별한 존재에 해당했다. 항상 가장 공손한 속국으로 칭찬받아,, 속국 중의 필두에 꼽히고 있었다..... ... 조선에게 명이 지배하던 중화의 땅이 청의 군림으로 이적이 되어버린 이상 명과 중화의 적통을 잇는 것은 조선 자신 밖에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명을 숭모하는 자세는 끝까지 고치지 않았다.

(83) 조선에서는 청에 가는 사절을 연경(燕京-북경)에 사자, 즉 연행사燕行使라고 부르고, 이들이 남긴 기록을 <연행록>.... 일본에 보내는 사절은 (84) 통신사인데, 그들도 <해사록 海槎錄> 등의 기록을 남겨... 청,...청, 일본 각 측에는 이 정도의 계통적이고 계속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에만 있다는 사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85) 안정된 관계의 지속은 사고를 매너리즘에 빠뜨려 외교의 경직화를 가져왔다. 200년은 그러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자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면목을 일신한 서양열강이 새롭게 동아시아로 진출해 들어왔다. 사고와 행동은 고정화된 데 반해 주위의 정세가 앞서서 유동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86) 1792년 영국은 사상 처음으로 중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했다.... 청은.... 그러나 그들을 단순한 조공 사절로 취급하여... 청의... 황금시대에 군림한 건륭제... 18세기말에...18 동아시아가 서양에 우위를 과시한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확히 반세기 후인 1842년 청은 영국의 무력에 굴복하여 남경조약을 맺게 된다.. 유명한 아편전쟁이 결과였다. 이리하여...이리하여... 조약을 통한 근대 서양식의 (87) 국제관계가 동아시아 처음 도입되었다....(88) (애로호 전쟁의 결과 맺어진 톈진조약,, 북경협정 등의) 조약관계는 ...조약관계는... 양자가 청조 내외의 모든 것을 규율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기 이전부터 존속한 종속 관계는 청의 입장에서는 조약, 국제법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89) 일본의 경우... 조약체결은... 중국의 그것과 거의 보조를 같이하여, 1858년 천진조약을 맺자 곧 일본도 미국, 네델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연이어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10년 뒤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총재의 정치체제가 변했다는 점에 있다.

메이지 유신을 초래한 일본의 내적 동향은 따라서 청의 경우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종속관계의 한쪽 당사자였던 청조는 (90) 서양 각국과의 조약 관계를 맺고 예전부터 내려오던 체제를 고쳤다. 교린관계의 한쪽 당사자였던 일본은 조약을 체결했을 뿐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탄생시켰다.... 청과. ... 막부의 안정이라는 (200년 동안 지속된) 종속관계, 교린 관계의 전제가 되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말 중국을 경유하여 기독교, 카톨릭이 전래된 이래 조선 정부는 이를 지배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의 인륜, 제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정학...정학 正學인 주자학을 (91) 수호하고, 사학 邪學인 카톨릭을 배척한다는 이른바 위정척사 衛正斥邪 운동이 그것이다.

...대원군의 척사 斥邪, 사옥 邪獄은 기독교라는 사학만의 문제가 아닌 서양 전체에 대한 경계, 적시로 나타났다.

 

(93) 병인.신미 양요는 조선과 서양 각국과의 사이에만 일어난 문제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상은...청과 조선 사이에는 종속관계가 있었으므로, 프랑스와 미국 양국 모두 조선과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청조와 절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94)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면 그 행위를 종주국인 청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교섭을 담당한 총리아문은 조선은 확실히 청의 속국이지만 조공을 하고 있는 것일 뿐으로 일체의 국사는 자주(自主)라고 회답하였다.

 

(95) 국면의 본질은... 서양에... 대한 대처라는 책임부담을 조선과 청이 서로 미루었다는 것에 있으며... 청과... 조선이 종속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

조선 유교 관료들의 의식구조는 이해하기 힘들고 합리성이나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21세기에서의 이 땅에서 동일해 보인다. 그 사대 事大의 목적어가 명, 청에서 일, 미로 바뀐 것 정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