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갑자기 생각나서 시집 몇 권을 주문했다.
예전에 잠시 술좌석에서 스쳐뵈었던 적이 있거니와,
경상도 보리문딩 (음가 없는 ㅇ 을 표시할 방법이 없네) 화법이 잠시나마 그리웠던 탓이다.
안상학 시인의 <아배생각>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경북 사투리로 이야기하는 이 시인의 낮은 목소리를
서울 생활 26년에도 버리는 못하는 경남 사투리의 사내로서는
사뭇 이해하기 힘들다.
서울 사투리를 구사하는 우리 동기들도 저 속깊은 뱃골에서 나오는 소리를
역시나 체감으로 알아 듣기에는 어려우리라.
아베 혹은 아부지 (경남 사투리)의 어감과는 차이가 경남북의 경계만큼이나 멀다.......
======================================================================
-안상학
지문이 반들반들 닳은
아버지의 검지는 유식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체에서 눈 다음으로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독서를 할 때
밑줄을 긋듯 길잡이만 한 것이 아니라
점자 읽듯 다음 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쪽마다 마지막 줄 끝낼 때쯤 검지는
혀에게 들러 책 이야기 들려주고
책장 넘겼을 것이다
언제나 첫줄은 안중에 없고
둘째 줄부터 읽었을 것이다. 검지는
모든 책 모든 쪽 첫줄을 읽은 적 없지만
마지막 여백은 반드시 음미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유식했을 뿐만 아니라
삿대질 한번 한적 없는 아버지의 검지였지만
어디선가 이 시를 읽고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여백을 읽고 있는 중이다.
'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암사 가는 길 (0) | 2010.05.04 |
---|---|
아버지의 지갑 (0) | 2010.04.22 |
박흥용의 만화 (0) | 2009.11.22 |
복효근 시인의 [목련꽃브라자]를 옮기며 (0) | 2005.12.26 |
인생은 아름다워 (0) | 2005.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