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표이거나 85표이거나,
자신들이거나 자신들의 조직이익을 위해 국가를 버리는 것,
주권의 주체로서의 국민을 버리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처단되지 못한 친일 부역이,
(좀더 엄밀히는 양반계급의 자기 보존이),
그리하여 유지된 자본과 계급의 세습이,
설사 "나라를 팔아먹어도 찍어준다는" 한 지역 유권자의 표현처럼,
나라를 팔아먹어도,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어도,
유지되었었고, 유지되고 또 그리될 (것이란 믿음이 깔려있는) 국회의원의 권력이
저 숫자를 만들었으리라.
해서,
식민지가 왜 가능한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는다.
하나의 국가가 식민지가 되는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또 관료나 정치지배계급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수 있겠다만,
깨어있지 못한 숫자로서의 투표가 만드는,
그리고 그 숫자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시키고자하는
저 부역자들이 결국 식민지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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