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역사의 시공간에서 '다음'이란 없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2. 9. 10:26

어느 (경상지역의 상대적으로 젊은) 국회의원이 탄핵 투표를 하고 나와 스스로를 '보수'로 칭했다. 

 

'보수'를 어떻게 정의할지는, 또 한국에서 '보수'가 있기는 한 것인가를 논하기에는 나의 범위와 역량을 넘어서지만,

단순하게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고,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존중하며,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국가안보를 강조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단순하고도 거친 정의에서 탄핵 반대의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시민을 '적'으로 간주한 '처단', '국회' 무시, 입법 사법권의 일괄 통치, '국지전'을 유도했던 정황이 그러하다.

 

그래, 나도 '보수주의자'다.

엘리트 교육을 '비교적'인정하는 편이고, 그러나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더 중요함을 믿는다.

전통적 가치를 위한 인문학 중심 교육을 지지한다. 

미국 보수주자들이 '건국의 아버지'를 존중하듯, 나 역시 우리 헌법의 정신,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의 기초 위에 있다.

 

그 어디에서 '국가 폭력'의 총부리를 시민에게 겨누거나, '적'으로 간주하라는 의미는 없다. 

 

얘기가 길어졌다.

 

 

"다음 탄핵 투표 때에는" 이란 표현은 역사의 시공간에서 자신에게 남겨진 현재의 비겁함을 숨기거나

혹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회피일 뿐이다. 

역사에서 '다음'은 없다. 그것은 역사에서 '가정'이 없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오직 '지금 그리고 여기 now & here'가 있을 뿐이고,

그 시점과 공간에서의 결정이 그의 가치관을 증거하며, 또한 행위의 결과로서 역사를 결정한다. 

 

그러한 현재의 공간에서 보수주의자의 판단이 미래의 가치를 담보할 때 진정한 보수가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