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검사 출신이 한 때 같은 편이었던 그이의 담화 (12.12)에 대해서 " '자백'하는 취지의 내용"이라고 표현했다.
그이의 담화는 나의 시각에서는 '자백'이라기 보다는 구체성을 결여한 모호한 '정치적 주장'에 가까왔다.
앞 뒤 맥락을 읽으면 '자백'으로 읽힐 수 있겠으나,
나는 그 검사출신이 '자백'이라고 단정한 그 화법이 불편하고,
그 누구든 그런 일상에서의 주장이 잠재적인 확정범으로 굳히는 '자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려 스럽다.
한 때는 같은 편이었을 것이고, 이제는 다른 편이기도 한 다른 한 검사는
담화한 그이에 대해서 검사들의 '사냥감'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사냥감'이 되어도 좋을, 그 표현 조차도 아까운 그이에 대해서 '사냥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검사들의 화법이라는데 대해 나는 역시나 불편하다.
언제든 누군든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그이를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다. 생명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범죄에는 그 어떤 변명도 필요치 않다.
다만 검사들의 화법에서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발화가 '자백'이 되거나, 혹은 그들의 사냥감'이 되는
그러한 비민주적 행태가
'보수도 아닌 보수'의 편이거나
혹은 '진보라기는 확신키 어려우나 반'보수'진영'으로 보이는 이 모두에게서
동일한 담화에 대해서 발화되었다는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런 행태에 대해 무심코 인정하거나 인식을 게을리한다면
시쳇말로 죽 쑤어 개 주는 꼴이 여전히 반복될 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줄 이가 없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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