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온전히 소유하는 시간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15. 20:41

얼추 20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싱가포르의 한 쇼핑몰에서 택시를 기다린 적이 있다.
택시가 들어오고, 손님이 내린다. 새로운 손님이 차에 오른다. 택시가 떠난다.
이렇게 보면 그냥 택시 승강장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의 순서를 촘촘히 본다면 조금 달라진다.
택시가 들어오고, 손님은 계산을 치른다. 뒷문을 열고 손님이 내린다.
이제 새 손님이 택시에 오른다.
(그 이전에, 새손님은 앞 손님이 완전히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앞손님이 택시 문짝을 닫기까지 기다린다.)
 
 
() 안의 그것이 우리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앞 손님이 소유한 시간을 온전히 인정한다는 것,
그래서 나의 온전한 시간을 또 보장받는다는 것.
 
저 택시 승강장의 순서에 우리의 모습을 대입해보면 
무언가 다른 것을 금새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문자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우리가 타인의 시간 속으로 얼마나 많이 무심히 들어가는지 
그래서 타인이 온전히 소유하는 시간을 얼마나 무시하거나,
혹은 그로 인하여 나의 온전한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거나 혹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여담이지만, 싱가폴 사람들도
당시에 국경 너머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 가면 
말레이시아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문화가 강제된 현상을 칭찬할 생각은 없다.)
 
항공기 복도에서 앞사람이 짐칸에 짐을 싣거나 부리는 시간을 
온전히 기댜려주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것은 너그러움이나 배려라고, 혹은 너긋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에서 앞 사람의 시간을 온전히 지지하고 보장해 주는
(비약이라고 느낀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근대 시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아름다움을.
 
(조금 천박하게 표현하자면,
앞사람이 돈을 지불하고 산 시간에 대한 자본주의적 대응일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모습의 한 단면이란 것도.)

결론적으로 돈은 시간을 소유한다.
불행히도 그것은 나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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