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애기장수 이야기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4. 21:43

고향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대신 집에서 쉰 발자욱 채 안 되는 쯤에 새미골이 있긴 했다.

정지간 앞 세수간에는 새미에서 길어온 물을 받아두는 물확이 있었다.

바닥은 돌가루(시멘트)로 덮어 두었으나 철망 녹이 스며 나와 불그스럼한 곳이 많았다.

마침 깜정 돌도마를 두어 빨래나 음식손질을 할 수 있기도 하였다. 

외할머니의 얘기는 그 우물과 정지간에 대한 이야기였을라나?

마을 뒷산에는 시루봉 큰 바위가 있어 장수가 태어남직한 때문이었을라나?

 

착하고 (그래서) 가난한 늙은 부부가 오랜 축원 끝에 애기를 얻었다.

애기가 태어나던 밤, 뒤산에는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고도 한다.

이놈이 글쎄 태어나자 말자 어깻죽지에 날개가 돋아 방안을 날아다니던 것이었다.

부모로서는 장군이 되어 나라를 뒤집을 이 애기가 겁도 났을 것이긴 했으나,

늦게 본 자식이라 쉬쉬하며 키우려 하였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라서 금새 마을에 소문이 나버렸다.

삼족을 멸하던 시절이었으니 어미로서는 하는 수 없이

애기장수를 새미가로 끌고가서는 애기장수의 어깨죽지 날개를 정지간의 무쇠칼로 잘라버리고

우물에 빠뜨려 커다란 바위로 우물 뚜껑을 막아 버렸다.

(새미골에 부엌칼을 가지고 가면 아니 된다는 방법 方法이 이 때문이란다.

 새미골 바닥에 간간히 비치던 붉은 색은 그때 무쇠칼로 내려친 날갯죽지의 핏물이라고 겁을 주셨다.)

애기 장수가 죽던 날, 무쇠칼에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으로 두 동강이 났다던가, 어쨌던가?

애기장수는 울면서, "오메요, 오메요, 날 죽인 것은 서러우나 마지막 소원이니 백 일 동안 이 우물을 열지 마소" , 라며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단다.

 

애기 장수를 우물에 빠뜨려 죽인지 아흔아홉 날 되던 날에

소문을 듣고는 나라님이 군사를 보내어 애기장수를 죽이러 찾아왔으나

(나라도 아닌 나라였으니 나라님이란 표현도 틀렸겠지만)

애기장수는 이미 죽어 찾을 수 없었다. 

관군들이 부모를 다그쳐 애기장수의 행방을 물었을 때, 이미 죽어버렸다고 답하였으나,

관군을 끝까지 무덤이라도 파보아야겠다는 기세였단다.

어쩔 수 없이 어미는 애기장수의 유언을 무시하고 우물을 가리키었는데,

관군이 우물을 막아둔 커다란 바위를 치우자,

(그 큰 바웃돌은 날아올라 시루봉 바우가 되었다는데.)

우물 속에는 어깨 죽지에 날개가 막 돋아 난 애기장수가 말안장을 얹고는 막 말을 타려던 참이었단다.

애기장수의 뒤편으로는 천의 군사가 만의 깃발을 들고 있었단다.

그러나 우물 속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은 애기 장수는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오메, 니 때문에, 오메, 니 때문에.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라면서

군사들과 더불어 우물 속으로 녹아내렸단다.

('니 때문에' 라는 구절은 옛 이야기의 단골이긴 하다.)

 

외할머니의 얘기는 몇 가지 "방법"들과 

"엄마 때문에"와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이 비난인지 혹은 체념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런 시절의 비애만을 조금 알 듯하다.

시절을 이기는 힘은 자연과 그리고 우물의 안팎에서의 사람들 함께 마음과 몸으로 애써야 가능한 법이라는 것을.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접은 사람과 꿈을 찾는 사람들 모두의 약속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을.

 

***

이 얘기의 끝에는 예전의 식대로, 이 얘기는 경상도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시루바우와 애기장수의 전설이었습니다그려.....하고 전설따라 삼천리 어쩌구 해야겠지만.....나는 무쇠칼의 두려움을 잊지 못한다.

 

***

아기장수의 꿈이 실렸던 이청준의 산문집,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