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20년의 위기, EH 카아, 김태현 편역 (1) - 세상을 변경하기에는 철학이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9. 11. 28. 01:06

20년의 위기, EH 카아, 김태현 편역, 녹문당





"권력에 이르는 길과 지식에 이르는 길, 즉 실천의 길과 학문의 길은 서로 가까이 있으며 거의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추상에 안주하는 고질병이 있기 때문에

실천적 문제로부터 과학을 시작하고

현실적 문제로 철학적 부분에 봉인을 쳐 두는 것이 안전하다." - 프란시스 베이컨, 신기관 Novum Organum (헌사)


제1부 과학으로서의 국제 정치학

1. 과학의 시작

1.1. 정치학에 있어서 목적과 분석


정치라는 현실 속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요가 정치학을 낳았다.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목적이 사유의 조건이다....

자연과학에서 특정목적을 염두에 두고 사실을 검토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타당하고 현실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암의 원인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암의 퇴치라는 목적처럼) 그와 같은 목적은

연구 그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별개의 일이다.그리고 그가 내리는 결론 또한 '사실'에 대한 보고서에 불과하다...

인간행태에 대해 연구하는 정치학에서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엄연히 사실로서 존재하는) 그와 같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21쪽)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에서 목적은 연구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연구의 목적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인 것이다....

목적과 분석은 동일한 과정의 서로 다른 부분일 뿐이다. ...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같이) 그러나 암의 경우와 달리 자본주의의 실체에 관한 사실은

자본주의에 대한 필자의 태도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22쪽)

모든 정치적 판단은 그 대상이 되는 사실을 변경할 수 있다. 정치적 생각은 그 자체로 정치행위이다.

정치학은 정치적 '현실' (what is)에 대한 학문인 동시에 정치적 '당위' (what ought to be)에 관한 학문이다.

곧 정치학은 '과학'인 동시에 '철학'이다. (23쪽)


1.2. 이상주의 Utopianism의 역할


목적이 먼저 사고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학문의 발달이 대개 의지나 목적의 요소가 특별히 강한,

따라서 사실에 대한 분석측면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23쪽)...


정치에 관한 최초의 '학문적' 시도는...연금술사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주창한 것은 현실을 전적으로 부정한 상상속의 세계였다. ...

그들의 정치학은 분석의 산물이 아니라 의욕의 산물이었다... (24쪽)

목표를 지향하는 초기단계는 인간사고의 핵심 기반이다. 의욕이 사상의 아버지이다.

목적은 항상 분석을 앞선다... (26쪽)


1931년 이후 드러난 일련의 사태로 인해 의욕만으로 국제정치학의 기반을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국제문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생각이 발 붙일 수 있는 여지가 겨우 마련된 것이었다. (27쪽)


1.3 현실주의의 영향


정치학의 경우 이상주의에서 전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정치학자들의 경우 자연과학자들보다 유토피아적 단계에 대한 미련이 크다는 점이다. ...

정치적 유토피아는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는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과학의 특징인 현실에 대한 어렵고 무모한 분석을 시작한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하나로서 "세계정부"를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과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그 의미가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것이다.)

학문을 낳은 목적 그 자체가 바로 분석의 핵심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과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단계에 있어 최초의 환상이 깨어지고, 유토피아적 시기의 끝을 기록하게 되는,

즉 사고가 소망에 미치는 영향을 흔히 현실주의라고 한다.... (28쪽)


성숙한 사상은 목적에 (목적을 부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과거시대의 사상이다.) 관찰과 분석을 겸비한다.

따라서 이상과 현실은 정치학의 두 얼굴이다. (29쪽)


2, 이상과 현실

2.1 자유의지론과 결정론


철학이란 언제나 세상을 변경하기에 너무 늦게 온다.

철학이란 기왕의 질서를 변경하는 수단이 아니라 알기 위한 수단이다. (31쪽)

이상주의자의 결점은 순진함이다. 현실주의자의 결점은 황폐함이다. (32쪽)


* 세상을 변경하기에는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라는 구절은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서도 보인다.

  여기서는 Knox의 번역판의 구절을 옮긴다.

One word more about giving instruction as to what the world ought to be.

Philosophy in any case always comes on the scene too late to give it.

As the thought of the world, it appears only when actuality is already there cut and dried after its process of formation has been completed.

The teaching of the concept, which is also history’s inescapable lesson,

    is that it is only when actuality is mature that the ideal first appears over against the real

    and that the ideal apprehends this same real world in its substance

    and builds it up for itself into the shape of an intellectual realm.

When philosophy paints its grey in grey, then has a shape of life grown old.

By philosophy’s grey in grey it cannot be rejuvenated but only understood.

The owl of Minerva spreads its wings only with the falling of the dusk.


2.2 이론과 실천


이상주의자들은 목적과 사실을 놓고 마치 목적만이 유일한 사실인양 취급한다.

소망을 사실인양 설파한다....

이들 명제는 사실에 대한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프로그램이다. ...(32쪽)


현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명제가 사실이 아니라 의욕에 불과하며...쉽게 인식한다.

그러나 정치이론의 선험적 성격을 부정하고 이들이 실천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폭로함으로써

현실주의자들은 쉽사리 결정론의 함정에 빠진다. (33쪽)


2.3 지식인과 관료


지난 2세기간의 지적 전통은 수학과 자연과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일반적인 원칙을 정립하고 개별사안을 일반적인 원칙에 비추어 검증하는 일이

모든 학문에 필요한 기반이자 출발점이라는 인식을 공유...

따라서 정치에 대한 지식인의 접근의 특징은 일반적 원칙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에 있다. (34쪽)


1905년에 이미 레닌은 "계급을 초월해 존재하는 지식인들의 낡아 빠진 사고방식"을 비난한 바 있다...

즉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은 곧 정치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5쪽)


반면 정치에 대한 관료들의 접근방식은 근본적으로 경험에 의존한다....

그들이 옳다고 믿는 바는 오랜 경험에서 얻은 일종의 직관이지 논리적 추론이 아니다....

관료란 사회내 어떤 조직보다 현행 질서와 전통을 고수하고...쉽사리 경직되고 결국은 내용없는 형식주의로 떨어지고 만다. (36쪽)


2.4 좌파와 우파


"좌파는 이성을, 우파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라고 나찌의 철학자인 반 덴 브룩은 주장했다. (39쪽)

...그러나 좌파는 현실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실천적 경험이 없다. ...

좌파 정당이나 정치가들이 정권을 잡거나 정치에 참여하여 현실을 접하면서

이상주의적 원칙론을 잃고 우경화하는 것은 거의 하나의 역사법칙에 가깝다. (41쪽)


2.5 윤리와 정치


목적과 사실을 구분할 때 이미 깔고 들어가는 가치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 사이의 갈등은

인간의 의식과 정치사상에 깊이 내재된 것이다.


* 제4부 법과 변경이 관심사의 하나인데,

이에 대한 추출은 다음 기회를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