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0) - 첫 페이지에 멈춘 발걸음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19. 11. 24. 23:58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서적


책을 읽다 첫 페이지에서 멈춘다.

이 그림 탓이다.


망구엘은 이렇게 적고 있다.


연인 사이인 Paolo와 francesca. 몸을 잔뜩 웅크리고 나무 밑에 앉아서 자신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시구를 읽고 있다.

파올로는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고 있고, 프란체스카는 자신들이 미처 거기까지 읽지 못하게 될 페이지에 손가락 두 개를 끼운 채 책을 펼쳐 잡고 있다. (9쪽)


기억이 맞다면, 나는 파리의 로뎅 미술관에서 동일한 모티프의 작품 le baiser를 보았다.

저 격정적인 입맞춤에서 그 어떤 불륜을 떠올리긴 힘들다. 애초에 불륜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음에.



단테는 위 그림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Francesca]:

one day, to pass the time away, we read
of Lancelot – how love had overcome him.
We were alone, and we suspected nothing.
And time and time again that reading led
our eyes to meet, and made our faces pale,
and yet one point alone defeated us.
When we had read how the desired smile
was kissed by one who was so true a lover,
this one, who never shall be parted from me,
while all his body trembled, kissed my mouth.
A Gallehault indeed, that book and he
who wrote it, too; that day we read no more." (Inf. V, 127-138)


어느날 우리는 재미삼아 랜슬럿이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읽고 있었는데,

우리 둘 뿐이었고 아무 의혹도 없었어요.

그 책은 자주 우리 눈길을 마주치게

했고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는데,

오직 한 대목이 우리를 사로 잡았소.

그 연인이 열망하던 입술에

입 맟추는 장면을 읽었을 때, 나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이 사람은

온통 떨면서 나에게 입을 맞추었지요.

그 책을 쓴 사람은 갤러해드 (게일호트)였고,

우리는 그날 더 이상 읽지 못했지요. (신곡 지옥편 제5장 127-138,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도대체가 첫 쪽을 넘기지 못한다. 오늘도 나역시.

억지로 독서가의 그림과 망구엘의 기술을 따라간다.


이들 모두가 독서가다. 그들의 몸짓, 기술, 독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책임감과 지식은 나의 그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지 않다. (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