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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I would prefer not to 선택할 수 없는 자의 선택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공진호 역, 문학동네  나는 초로에 접어들었다....먼저 나로 말하자면 젊어서부터 줄곧 평탄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다....고백하건대 나는 그 (시적 열의는 별로 없는 저명인사였던 고 존 제이컵 애스터)의 이름을 되풀이해 말하기 좋아한다. 그의 이름을 발음하면 둥그렇게 오므린 입안에서 소리가 회전하는 듯한데, 그것이 마치 금괴를 두드리는 듯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나의 사무실은 월스트리트 2층에 있었다...그쪽 창밖으로는 높은 벽돌 벽이 훤이 내다보였다.  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내가 낸 광고를 보고 찾아와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애기장수 이야기

고향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대신 집에서 쉰 발자욱 채 안 되는 쯤에 새미골이 있긴 했다.정지간 앞 세수간에는 새미에서 길어온 물을 받아두는 물확이 있었다.바닥은 돌가루(시멘트)로 덮어 두었으나 철망 녹이 스며 나와 불그스럼한 곳이 많았다.마침 깜정 돌도마를 두어 빨래나 음식손질을 할 수 있기도 하였다. 외할머니의 얘기는 그 우물과 정지간에 대한 이야기였을라나?마을 뒷산에는 시루봉 큰 바위가 있어 장수가 태어남직한 때문이었을라나? 착하고 (그래서) 가난한 늙은 부부가 오랜 축원 끝에 애기를 얻었다.애기가 태어나던 밤, 뒤산에는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고도 한다.이놈이 글쎄 태어나자 말자 어깻죽지에 날개가 돋아 방안을 날아다니던 것이었다.부모로서는 장군이 되어 나라를 뒤집을 이 애기가 겁도 났을 것이긴 했으나,..

시코쿠 오헨로길 26 - 은하철도 999의 시발역

44번 절집을 찾아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기차역, 新谷 Niiya은하철도 999의 시발역이라고 한다.만화가의 어린 기억에 남아있던 마을,神南山(かんなんさん)과 증기 기관차蒸気機関車의 기억이 만화의 모티프가 되었다는데....내가 순례를 나선 2023년 만화 작가 역시 세상을 떠났다.

섬, 혹은 정체

한국사회 혹은 그의 계급이 한국전쟁으로 리셋되었다는데 동의한다면,계급사회의 징후가 이미금 완연하다는 데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이곳을 만든 것들은 한국전쟁의 리셋과 이로 인한조선 계급사회의 붕괴 (유교와 양반 귀족 가문을 포함하여),교육열과 부동산의 획득 가능성과 이에 기반한 계층이동의 열림,(하필이면 혹은 당연히도) 일본이라는 기술선진국과 중국이라는 노동 집약국과의 적절한 이격거리로기술적 산업화가 가능했던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의 이완이 복귀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부동산과 금권력에 기반한 계급화로의 급속한 회귀,보수도 진보도 없는 사상적 토양과 양당제라는 이름의 붕당 정치체제,노동집약과 저임금을 탈피한 중국 산업구조와의 중첩(과 일본의 제한적 쇠락)에도 불구하고우..

한강 작가의 노벨상에 부쳐

내 생애의 하루에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이 소식의 이면에 나는 조금 씁쓸하다.망쪼가 들었단 밖에 달리 설명되지 않는 여기 이곳에서,그런 망쪼의 흐름을 3년정도 늦춘달까. 좋을 일도 더 나을 일도 없는 땅에서,그이의 수상 소식이 대세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나,문제는 그런 것들이 유도하는 곡해의 와류에서누군가는 희망을 변곡점을 보려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한국문학이 세계문학도 아니려니와깊은 사유와 철학적 기반의 산물도 아닌 한에서,이 역시 자본에 몰입된 문화적 천박함을 가리는잠시간의 허상으로 작동할 것이기에 그렇다. 내가 모비딕을 읽었을 때,미국문화가 유럽을 넘어섰다고 느꼈던그런 전율이이제 그이의 글을 밀어왔던 또 그리고 앞으로 밀고 나갈 많은 이들의 글에서오늘을 자양으로 삼아 ..

꽃에라도 물들지 말라

산 그늘이 산빛을 떠나야 산을 넘듯,꽃그늘 꽃을 지난 자리가 서늘하다.  새들 날아오른 가지는 새를 찾아 그리워 하지는 않아,꽃도 꽃가지를 떠나야 가을을 맞는다. 남겨 새겨진 것들엔 상처만 깊으려니,그저 노을 흘러가는 강물로만 같아라. 그대, 꽃에라도 물들지 말라. 먼 길 닿는 저녁이면꽃물 든 가슴에는  별빛조차 아리다.

단산(斷産), 사회경제적 질곡에 대응하는 생물학적 응답

사회적 질곡이라면 또 모를까, 사회경제적 질곡에 대한 생물학적 응답이라.....말을 해 두고도 곱씹어 보아야 한다.그러나 인간행위로서 사회 경제적이란 상위개념을 도입한다 한들그것이 인간 생물적 행위의 결과이고 보면,생물학적 반응이 응당히 있어야 할 것이란 데 또한 동의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단산, 그 끊어냄을 통한 디플레이션으로서의 방향성,그것이 경제적 현실에 반응하는 생물학적 응답의 한 형태일 것이다.지금 여기 이 땅에서는.

김용호, 주막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酒幕)     그    수없이 많은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威儀)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빗긴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엔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오래된 시 한 편을 옮긴다.마산 사람 김용호의 시편이다.탁자옆에 놓인 소금독의 왕소금이나마 안주 삼아잔술을 먹어본 이만이 알 수 있는 허..

장만옥의 보온 국수통 - 화양연화에서

홍콩에서 생활한 적은 없지만, 싱가폴의 문례(文禮)동 생활은 꽤차 한 지라,저 장면은 익숙하다. 런닝만 입은 노점장터에서 국수를 팔고있는.사실 국수이기 보다는 그 다음 장면에서 양조위가 먹고 있는 완탕수프일 가능성이 높다. 여튼 스탠리 빛깔의 햄머톤이 낡을수록 아름다운 저 국수통 때문은 아니겠지만스탠리의 죽통, 써모스의 죽통, 에스비의 죽통 그리고 또 몇 가지의 죽통을 가지고 있다. (손잡이가 없다는 게 흠이다.)한 번도 요즘말로 테이크 아웃을 한 적은 없다지만. 저 처연함이 묻어나는 장면, 슬프다 못해 아름다운 장만옥의 뒤태가 가슴아픈 계단 장면,흔들리는 보온 국수통은 늘상 우리 삶의 모든 때와 곳의  자락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아버지 술국 심부름으로 양은 주전자에 우동국물을 받아오던 기억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