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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 오헨로길 25 - 찰소 (札所)

시코쿠 길을 걷다 보면 일본식 한자로 씌여진 안내판 등을 보게 된다.우선 우리네도 사용하는 용어부터 정리하자. 寺刹 : 사 寺는 절집(사)이나 관청 (시)을 뜻한다. 원래 자형은 발(止)을 손(又)으로 떠받들고 있어 모신다는 의미라고 한다.          찰 刹은 범어 刹多罗 산스크리트 क्षेत्र (kṣetra, “land, domain”)에서 온 말로, 역시 절집을 의미한다. (참고로 내가 곧잘 사용하는 '절집'이란 표현이 불교를 낮추는 것이란 시각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당우'나 '전'이란 한자를 쓰면 높임이 된다는 시각에는 반대한다. 그러고 '집'이란 '짓다'로 표현되는 언어의 아름다운 원형이다.) 걷다 보면 만나는 표지판 등에는札所 (찰소, ふだしょ )라고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처음..

중세문화이야기, 존 볼드윈 지음, 박은구, 이영재 옮김 -고딕, 신의 집을 짓는 지상원리, 적정비와 아름다움 그리고 신적 빛과 조명

중세문화이야기, 존 볼드윈 지음, 박은구/이영재 옮김, 혜안 제1장 정치적 배경 1259년 ...영국 군주와 프랑스 군주의 영토를 재정립하는 협약을 체결하였고, 13세기 중엽에 왕실령에서 확보된 이러한 정치적 평화는 (25쪽) ... '프랑스의 심장부이자 평화의 땅'이었던 몽에리Montlhery성은 프랑스 왕국의 정치적 안정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26쪽) 이 정치적 과업의 위대성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중세 유럽이 겪었던 정치적 경험을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승리(BC 31)로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AD181)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은 지금까지 누린 적이 없었던 지속적이고도 오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3세기가 되자 내부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여 4세기에는 야만족..

나의 카메라 이야기 18 - 삼성 미놀타 Hi-Matic S

어쩌면 디자인은 단순함에서, 그리고 덧 올려진 기능의 간결함에서 그 생명을 얻는다. 익숙하되 질리지 않는 다른 쪽을 보여주는 듯한 그런 단순함. 삼성 미놀타의 그것은 1978년인가의 시간을 지나와서 지금도 여전히 새롭다. 무슨 이유로 부분 부분 플라스틱으로 설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벼움을 얻었으되 무언가는 잃었으리라. 삼성정밀(엄밀히는 삼성)의 로고가 붙은 minolta HI-MATIC S모델은 당시 300대 생산이었다고 알려져있다. (그게 이 고장난 카메라의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뒷면의 시리얼만 보면 302082. 300대 중의 몇 번 째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당시 판매가가 9만원대였다고 한다. (나는 그즈음 아사히 펜탁스를 25만 원 들여서는 원 주인의 요청으로 돌려준 적이 있다. 당시 평균 ..

우도에서

섬마을을 급하게 돌아 나온 갯바람이 잠시 숨결 고르듯 나의 그리움도 그러하리 감물 맛이 묻어나는 우물 언저리 당산목에 걸려있는 가오리 연은 꽁지를 잃어 따스한 겨울비 한 자락으로 잊혀지리니 행여 청각 향 썰물 속으로 밀려나 그대에게 가는 길 아득해지면 햇살아래 맑은 깻돌로 드러난 아, 언제고 너의 마당으로 맨발로 뛰어들던 나는 못내 열일곱의 파도

술국

자박자박 철둑길 간다 - 술국 한 줜자 사 온나. 개똥 옆에서도 쇠뜨기 풀자락 성성하고 비름풀 오도독 먹빛 퍼덕이는 밤길 토악질 눌러붙은 침목을 하나 둘 밟아 주전자 가득 가락국수 국물 철벙이며 경화반점 중국집 다녀오던 길 큰 곰 작은 곰 술국자 같은 별을 헤면서 예전의 걸음으로 따라서 가다 보면 이제는 술 끊으신 아버지 대신 화차는 멀리서 꺼이꺼이 술 트림이 잦다. *1998년의 어느날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먼길을 떠나시기 전이다. 경화반점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철길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밀포드 사운드

2016년. 뉴질랜드 남섬의 남쪽. 단어 Sound는 피요르드 fjord 지형을 일컫는 고대 영어와 노르웨이어 sund에 기원을 두고 있는 말이다. '소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보통은 빙하로 깎인 하구 지형을 말하는데. Sound자체는 좁은 물길, 특히 두 산덩어리 사이를 지나는 물길을 일컫는다. 밀포드 사운드는 유럽의 바닷표범 포경선장인 John Grono가 웨일즈 지방에 있던 유사한 지형 Milford Haven을 따라서 지은 이름이라고 알려져있다. 이걸 뒤늦게 포스팅하는 까닭은 여기에 트레킹 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일부 구간만을 걷거나 하였는데. 이제 제대로 걸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이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0 노동과 노동자 - 자유로운 활동에는 사례금이, 얽매인 활동에는 임금만이 지불되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0 노동과 노동자, 베르너 콘체 지음, 이진모 옮김, 푸른역사 화폐경제, 도시경제, 해양경제가 발달함에 따라...육체노동으로서의 노동(농사나 제조활동)은 완전 시민이 아니고 노예에 이르는 하층민에게 부과되었으며 (16쪽)...수공업적 노동이나 임금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이미 오랜 예전부터 있는 일 (17쪽) 플라톤은...육체노동을 하는 자들의 생활방식은 시민적 덕목과 합치될 수 없다...(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덕을 가진 자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고전고대의 정치관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폴리스에 적합한 덕목 위에 성립되는 것...노동이 아니라 적절한 활동이 시민의 특징이었다. 한편에 노동과 시민적 덕목이, 다른 한편에 노동과 교육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에 세 번째 대립개념..

코젤렉 개념사 사전 20 헌법, 국민은 헌법 상위에 헌법제정 권력으로 존재한다.

코젤렉 개념사 사전 20 헌법, 송석윤 옮김, 푸른역사 입헌주의의 시작 - 혁명전의 용어 (북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두 성공적인 혁명으로 근대적 헌법들이 제정되었을 때와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자연법적 계약론은... 자연상태와 결별하고 국가로 결합하는 합의(pactum unionis)와 정부 형태의 확정 (pacturm ordinationis) 및 통치자에게 복종하겠다는 서명 (pactum subiectionis)으로 이루어진다. ...Verfassung계약과 기본법은 동일한 사안의 두 측면으로 보인다. Verfassung 계약이 그 과장에 치중하는 반면에 기본법은 그 생산물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Verfassung은 계약을 통해 형성되고 기본법적으로 규정된 국가의 정치적 상태이다...계약에 근거할 때 ..

기술적인 안전? 원전 방사능 오염수

일본이 방류하고자 하는 원전 오염수는 '기술적'으로 안전하다. 이는 우리가 아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그리고 그 범위라는 한계 안에서- 그러하다. 현재의 기술수준에서 위험하다고 알려진 물질의 소멸 혹은 분리, 중화가 아니라 단순히 희석시켰으므로. (희석이 현시점의 기술수준으로 '기술적'으로 안전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 '기술적'인 안전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안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술적'인 안전이란 어쩔 수 없는 상태나 국면에서의 선택지이지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기나긴 시간과정에서 또 인류진화의 과정에서의) 안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너질 수 없다는 건물도 무너지고, 튼튼하게 지었다는 다리도 자빠지며, 인간의 모든 공학적 행위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지극히..

'천벌'을 잃은 시대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몇 가지 단어들이 있다.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비단 말 뿐이겠는가? 시대와 사물 역시 이러한 잃음 혹은 잃어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나의 경우에는 '천벌 天罰'도 그 하나로 꼽는다. 세상에 스스로 대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그나마 하늘의 힘-대신해줄 사람들의 힘-을 빌어 자신에게 씌워진 불평등을 걷어내고자 했던 아쉬움이 무당의 살풀이 같은 한스런 단어에 묻어 있다. 시대의 한계 속에 자발적 순응을 택했던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때 그나마 믿을 만한 구석을 만들고자 했던 그 단어, 천벌, 우리는 그 단어를 잃었다. 애초에 천벌은 없다. 일찌기 김남주 시인이 서슬퍼런 시절에 말했다지 않던가. 정당화될 수 없는 국가와 자본의 폭력으로 처참히 쓰러지는 세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