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강대국 흥망사, 찰스 P. 킨들버거, 주경철 옮김, 까치, 1996 (2004)
[7. 영원한 도전자 프랑스]
"...이 나라는 풍부한 경제적 생산, 충분한 신용, 번성하는 사업, 대규모의 해상무역 같은 필수요소들"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성장이 쇠퇴로 이어진다는 우리의 복잡한 국가 생명주기모델에 대해서 다른 측면에서 예외적이다. 이 나라는 우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나머지 나라들에 비하면 장기적인 쇠퇴도 겪지 않았다.
인구성장이 농업생산보다 빠르면 -도시든 혹은 현물지대가 지불되는 농촌지역이든- 가격상승, 인플레이션, 기근이 일어난다. 흉작은 그 어려움을 배가한다. 인구증가는 또한 엘리트들의 지위 경쟁을 야기시킨다....인구증가, 인플레이션, 기근, 고위직에 대한 경쟁심화라는 네 요소가 모두가 필요조건인지, 혹은 차입과 과세문제를 놓고 나타나는 무분별한 충돌이 충분조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연속적인 붕괴는 그때마다 다양한 비율로 그 요소들을 결합시킨다.
징세청부는 왕실의 재원을 늘리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징세청부권은, 제한 없이 부여됨으로써 그것이 점차 사유재산이 되도록 놓아두는 것보다는, 영국에서처럼 경매를 통한 매각과 재매각 방식으로 단기계약으로 임대될 때 가장 잘 기능했다. 프랑스 관리들의 부와 지위에 대해서 위협이 가해지자, ....
지중해와 대서양 및 북해 방면에 각각 하나씩 두 개의 함대가 필요했던 프랑스는 부분적으로 지리의 희생자였다.
(루이 16세 치하의 재정체계 붕괴에 기여한.....) 역사는 포퓰리스트, 군사독재, 테러, 무질서, 증대하는 군인에 의한 지배로 정점에 이르는 거의 획일적인 국가 붕괴의 경향을 보여준다. 재건된 군대는 에너지와 이상을 실현하지만, 민주주의를 용납하지는 못한다.
프랑스의 교육에 대해서...첫째, 프랑스의 고등교육은 대개 실용적이기보다는 데카르트적이고 연역적인 것이어서, 수학과 순수과학을 강조했으며,... 그 뿌리는 18세기 계몽주의에 놓여 있다. 둘째, 관련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위신이 매우 중요해서, "영광 gloire"이라는 단어는 특히 이공계 학교의 토론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셋째, 이공계학교의 졸업자들은 처음에는 군대로 진출하는 사람들과 교량도로학교, 광산학교 등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질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빈번히 산업계로 진출했다.....주된 요점은 19세기에 프랑스의 고등교육이 영국과 몹시 다르다는 점이다.
이 세 나라 (독일 영국 프랑스) 사이의 비교는 사회적 역량 social capability을 측정하는데에 교육 년수를 사용하는 아브라모비츠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사회적 역량이라는 개념은 비록 경제성장 잠재력을 측정하는 유용한 개념이지만...이와 함께 인구증가로 인해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적절한 고용기회를 찾을 수 없게 된다면, '더 많은 교육'이 경제성장을 도울 수 없다는 로즈크런스의 주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 전쟁의 끝 무렵에...봇물 터지듯이 영국을 방문했던 프랑스 광산국의 드 갈루아는) 그는 보고서에서 광산입구로부터 타인 강의 선착장까지 석탄을 운반하는 목재선로로 묘사한 다음 이것 때문에 앙쟁의 광산에서 일하는 마차꾼이 일자리를 잃지 않을지 우려했다. ...당시 프랑스는 수입석탄에 대한 복잡한 관세체제-다른 곳보다 철강산업 부근의 항구에서 세율이 더 높았다-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석탄가격이 부분적으로 인공적인 것이며 순수하게 부존자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외국 방문은 그랑제꼴의 추상적인 교육에 유용한 보완물이 되었다....파리에서는 철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런던에서는 그것을 만든다.
각각의 시기에 성장을 만들어내는 힘, 마찰을 일으키며 성장에 저항하는 힘, 그리고 어느 쪽 방향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잠재적 중요성을 가지는....마지막에 언급한 힘의 사례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길드이다. 그것은 훈련과 표준을 제공함으로써 한 산업의 초기에는 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나중에는 독점적 규제를 요구하게 되고 기술변화에 저항하기 때문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우선 19세기의 농업에....)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농장에 거주하며 토지상속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위장실업" 때문에 프랑스의 농업생산성 증가가 지체되었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사랑과 다음 세대의 가족들에게 토지를 물려주려는 경향 때문에 도시를 향한 농촌인력의 대탈출-일찍이 1880년대부터 이 현상에 대한 불평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이 지체되었던 것 같다....그러나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농촌 사람들이 도시가 그들에게 오라는 손짓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도시 교외의 빈민촌으로 몰려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보더라도 공급이 수요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 대혁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구체제의 귀족적 가치가 지배했다. 이러한 정신은 개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부심을 특징으로 한다....귀족들은 상업이 고상하지 않다고 여겼고, 그래서 지방 신사와 부르주아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부르주아지는 성을 소유하고 귀족 신분으로 상승하기 위해서 부를 갈망했다. 그랑제꼴의 졸업생들은 탁월성, 심지어는 거만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지성을 갖추고 훈련을 쌓았다.
영광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드골은 세계통화인 달러를 공격했다. 세계언어로서의 영어(차라리 미국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의 확산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저항은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제연합조직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구성원들의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전 식민지들에게 값비싼 지원을 해야만 했다.
[8. 영국, 전형적인 사례]
영국의 도약시점을 다소 지나치게 명확하게 1783년으로 설정...이 해에 조지 3세가 미국 식민지들의 독립을 승인한 파리조약을 체결한 직후에, 바로 이전 식민지들로의 수출이 갑자기 급증했던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선견지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한 대목에서.....대영제국이 자신의 식민지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대영제국은 즉시 식민지의 평화를 확립하는 연례비용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국을 자유무역에 단단히 붙들어두는 상업조약을 식민지들과 체결할 수 있으며, 이는 비록 상인들에게는 덜 유리하지만, 국민 대다수에게는 현재 영국이 누리는 독점보다 유리할 것이다...
(<산업진화>라는 제목의 책에서) 산업혁명의 실재 여부는 전체적으로 실제 경제적 중요성이 별로 없는 의미론상의 문제이다. ....진화론적 발전도상에서 한 번의 단절이 곧 산업혁명 (고유명사로서)이며, 이는 로마 제국의 멸망,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세계사에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초래했다.이 말은 앨프레드 마셜의 <경제원론>에 나오는 '자연에는 불연속이란 없다'라는 명구와 대조적이다.
당대인들의 견해를 일단 무시한다면, 과연 "혁명"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대개 저축, 국민 일인당 소득, 수출 등을 측정하느냐 아니면 발명과 혁신을 측정하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쇠퇴에 대한 서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앨버트 허쉬먼이 "연계 linkage"라고 명명한 방식대로 하나의 성공이 다른 성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비사 flying shuttle의 사용 결과 방직에서 이루어진 개선은 방적에서 병목을 야기했고...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보론>에서 페르낭 부르델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영국 산업혁명에 대한 병목현상 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다"고 언급했다. 내 (찰스 킨들버그) 생각에 이것은 문제를 전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성장은 거의 언제나 불균형적이기에 늘 병목현상을 일어킨다.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것은 생명력과 정력이 있고 여기에 더해서 필요한 공학적 기술까지 갖춘 인물들이 존재해서 병목현상을 돌파했다는 점이다.
1871년 독일제국의 성립이후 독일은 자유무역주의로부터 후퇴...1879년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호밀과 철에 대한 관세를 필두로 관세인상정책을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자유무역에 집착했다. 이것은 경로 의존성, 혹은 1850년대 농업성숙기의 영광에 대한 집단적인 기억, 혹은 다른 나라들이 영국상품에 대해서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할 때조차 자유무역이 자신과 국가에 이롭다고 확신했던 지배적인 제조업자층 때문일 수 있다.
일부 분석가들은 해외투자가 19세기 마지막 3분기 동안 영국 산업이 겪은 어려움의 원인이었다고 지목한다.대부분이 기간 자본의 해외유출 및 국내산업의 점진적 쇠퇴는 더 이상 위험감수(당시에 산업은 이렇게 간주되었다)를 하지 않고 외국 정부 및 철도에 대한 투자로 전환하는 증거였다.
계량 역사학자인 랜스 데이비스와 정치사가인 로버트 허튼백은 제국의 방어를 위한 비용이 중간계급 납세자에게 부과된 반면에 제국의 수익은 자치령과 식민지의 기업, 본국의 엘리트층이 누렸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공공재 이론에 따르면, 지도자는 위신을 누리는 대가를 지불하고, 무임승차자들-이 경우 식민지와 자치령들-은 실질적인 비용 분담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부분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제국이 영국을 방어하는 데 기여한 바를 과소평가한다는 생각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패트릭 오브라이언은 더 근본적인 질물을 제기한다. 그는 과시적이며 위신을 위한 기획에 불과했던 제국의 방어 때문에, 진정으로 우려할 상황이었던 유럽대륙에서의 독일의 공격적인 기세를 봉쇄하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역기능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프랑스가 국제 금융 중심지로 대두하게 된 것은 도리어 1850년대였다. 하지만 1870년 프랑스 은행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와중에 금태환성을 정지하자 그 지위를 상실했다. 배젓은 1870년 이전에 유럽에 현금 저장고가 영국 은행과 프랑스 은행 두 군데 였지만 프랑스의 금태환 정지선언 후 "현금지불에 대한 모든 책임이 ...영국은행에 지워졌다"고 언급했다. 영국 은행은 1870년 이전이나 이후에나 위기시 프랑스 은행을 비롯한 다른 중앙은행들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영국은 대개 파운드화로 무역자금을 대는 세계 통화체제를 운영했다. 이러한 금융상의 역할은 세계를 자유무역으로 이끄는 역할이 종말을 고하기 시작할 때 맡게 된 것이다.
영국 해군이 19세기부터 기관설계 개선에 관심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증기기관과 석탄 연료기관에서의 성공이 석유 및 디젤 기관의 성공으로 쉽게 전이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영국의 조선 목공들은 목선이 철선에 자리를 내주어 보링러 제조공들이 자신들의 노동 독점을 잠식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했고, 다시 보일러 제조공들은 1900년 이후 미숙련 견습공들도 사용할 수 있는 기체 공작기계들의 도입에 저항했다.
쇠퇴의 시점을 달리해보면, 제1차 세계대전시 플랑드르 전장에서 유망한 젊은이들이 끔찍하게 학살된 것을 영국 쇠퇴의 원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납득할 만한 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쇠퇴를 우연한 전쟁과 전쟁을 장기화시킨 군사적 아둔함이라는 외부적 혹은 외생적 요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쇠퇴가 그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해명은 기각된다. 여러 연구자들이 제시하는-때로 서로 겹치는-원인들로는 선두주자의 불리함, 영국사회의 아마추어 전통, 영국의 교육체계, 성공적인 기업가들과 그 후손들을 산업으로부터 공무 및 금융으로 빠져나가게 한 영국사회의 개방성, 더 효율적인 규모의 대기업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지연시킨 제도적인 경직성, 노동조합의 저항적 성격 등이 있다.
조금 더 일반적인 공식화를 하자면, 쇠퇴가 일어난 이유는 성공적인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다양한 경직성과 습관들 때문이며, 이러한 경직성과 습관들은 새로운 인물들의 수혈이 없는 한 너무 높은 거래 비용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경제적 동맥경화증"이라고 부를 수 있으르 것이다.
세계의 소득이 증가할 때, 어떤 상품은 처음 도입될 때는 소득 탄력적이지만, 일상적인 생활수준에 통합되면서 소득 비탄력적이 되고, 시간이 흘러 소득이 더 증가하면 수요가 감소하는 열등재가 될 수 있다(아연도금 철판 지붕이 대표적이다)....엥겔의 법칙에 의하면 경제성장에 따라 과거의 산업과 서비스로부터 새로운 계통의 산업과 서비스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구식 기업과 과거의 산업전통으로는 이루기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