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경제강대국 흥망사, 킨들버그 - (4) 과두집단은 자신들의 수입을 주택, 토지, 증권에서 얻음으로써 네덜란드의 해상권 상실을 방치했다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2. 3. 17. 22:21

경제강대국 흥망사, 찰스 P. 킨들버거, 주경철 옮김, 까치, 1996 (2004)

 

[6. 저지대 국가들]

 

- 브뤼주

 

 한자동맹 Hansa Bund의 코그선들은 특히 포르투갈과 프랑스로부터는 청어와 대구를 절이기 위한 소금을, 브뤼주로부터는 모직물을, 런던으로부터는 금속류를 구매하여 동쪽으로 운송했다. ....한자동맹의 무역관행은 원시적이었다. 한자 동맹은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발행한 환어음을 거부했다. 각 항구에 정박한 선박들은 현지 화폐로 상품을 매매했다. 차액은 정화 species로 지불되었다. 한자동맹은 또한 책임이 널리 분산된 느슨한 정치적 구조가 특징이다. 

 

무역은 점차 금융으로 진화했다. 금융가 집다는 셋으로 구분되었다. 담보를 바탕으로 대부를 해주는 전당포 주인들, 환전업자로 출발해서 후에는 대체예금 transferable deposits을 취급했던 원조 은행가들 proto-banker, 어음을 통해서 상이한 장소간에 자금을 이송하는 상인-은행가들이 그들이었다.

 

브뤼주의 쇠퇴...에 일조한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츠빈 강이 침니로 막힌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형선박이 북해의 전진항구 foreport인 슬뢰이스에 화물을 내리게 되었으나, 이어서 슬뢰이스도 침니로 막히게 되었다. 운하개설 및 하구의 준설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효과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브뤼주 쇠퇴 이면에 있는 진정한 원인은 경쟁에 대응하지 못하여 도시의 독점이 무너진 것이다.... 선박들이 뤼베크 항에 정박하기에는 너무 대형화되면서 한자 동맹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16세기가 개시될 무렵에 브뤼주에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 안트베르펜

 

브뤼주가 중계항 역할 뿐만 아니라 현지 생산품을 수입품과 교역한 반면에, 안트베르펜은 주로 시장 역할에 치중했기 때문에 생산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게다가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인들에게 위기감을 줄 정도로 곡물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특정상품의 대부분이 한 곳에서 거래되었다는 의미에서 세계시장이 출현했다. "

 

전쟁, 특히 용병들이 수행한 전쟁은 자금 대부수요를 증가시키기만 했을 뿐 그 지불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1585년 셸트 강의 봉쇄 이후 모두 10만 명이 브라방과 플랑드르를 떠났는데, 이들은 대부분 상인 혹은 숙련 장인으로서, 유동자산과 산업기술을 가지고 떠났다. ....이러한 이민에도 불구하고, 일부 상인들은 아예 상업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부를 토지에 투자하여 현지 귀족층에 합류했....다.

 

- 홀랜드

 

1590년부터 1620년에 이르는 북부 네덜란드의 급성장은 경제기적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몇 가지 지리적 이점이었다. 브뤼주와 안트베르펜은 대서양, 북해 및 발트해로의 접근이 용이했고, 넓은 하천들이 흐르는 풍부한 배후지가 존재했으며 (영국의 하천들은 모두 서로 멀어지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비해) 삼림이 부재한 상황에서 연료의 역할을 대신하는 이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다른 요인들은 유력한 귀족층과 강력한 교회의 부재라는 구조적인 것이었다. ......강력한 교회의 부재는 불완전한 종교개혁의 결과였다. 

 

(앨프레드 마셜에 따르면) 1660년대에 이르면, 본래 네덜란드 번영의 기반이 되었던 절약하고 삼가는 관습들이 세속적인 허영과 사치의 과시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얘기되었다....이는 공화국의 미덕이 방탕으로 타락하는 것에 대한 고전 로마의 스토아주의적 비탄의 최신판에 불과했다. 

 

- 상업

 

네덜란드는 16세기 말의 치열한 경쟁에서 한자동맹을 물리친 후 기본적으로 어머니 무역 moederhandel으로 이익을 얻었다.....(17세기 중반 영국 공사로 헤이그에 머물렀던 조지 다우닝 경도) 화물량은 적으나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지중해 및 아시아와의 "귀중품 무역 rich trades"과 네덜란드가 영국의 경쟁을 물리친 발트 해 무역 및 어업이라는 "잃어버린 무역"을 구분했다.  발트해는 연간 7개월 동안 결빙되었고, 대서양의 폭풍이 늦가을과 겨울 동안 남북간 항해 위험을 가중시켰다. 이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북쪽으로 향하는 사치품과 남쪽 에스파탸를 향한 부피가 큰 상품들을 대량으로 모아둠으로써 거대한 창고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가 국내 생산품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이 잘 지켜지는지 통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연히 분권화보다는 집권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 (1668년 조사이어 차일드 경은) 네덜란드의 무역이 중계에 기반해 있고, 중계무역에서의 독점은 중계시장에서 획득하는 수익이라든지 포장 및 재포장 가격에 대한 정보가 널리 확산되면 결국 무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담 스미스가 범한 보기드문 실수 중의 하나는) 이는 등급화, 포장 및 보관과 같은 중계시장 기능과 보다 큰 시장이 가지는 '규모의 경제'를 간과한 것이다. 

 

윌슨은 암스테르담이 무역으로부터 금융으로 전환하는 동기에 대해서 대체로 암스테르담이 무역 중계지의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 산업

 

홀란드의 주요 산업은 무엇보다 조선업이었다. ......일부는 영국의 관세법 때문이었고 또한 해외 해상용품 수입을 영국 선박으로 한정시킨 항해법 때문에......네덜란드의 해운비용은 다른 나라의 1/3 정도로 저렴했다....공적 지출 덕분에 사적 이익이 증가한 또 하나의 사례는 상인들이 사략선과 해적들로부터 자신들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홀랜드에 있는 해군부에 호위함선들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선박 중에서도 동인도 제도와 서인도 제도를 오가는 선박들은 자체무장을 적재할 만큼 충분히 대형이어서 선단을 이루지 않고 대개 홀로 출항했다. 이에 비해서 영국 선박들은 크기를 불문하고 모두 상품과 총포를 싣고 항해해야 했다. 

 

17세기 이후 이탄은 적정한 깊이에서도 점차 구하기 힘들게 되었고, 따라서 더욱 비싸졌다. 

 

오늘날의 논쟁의 초점은 18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그 쇠퇴가 상대적이었는가 절대적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모아지고 있다.

 

-금융

 

(제임스 트레이시는) 네덜란드의 각 주들이 상인-은행가들로부터 대부를 받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부자들에게 직접 채권 rentes를 판매하기 시작한 16세기 중반부터 금융혁명이 시작되었다고 가정한다....(클라인은) 무역에서 금융으로의 이동은 심성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보는데, 이것은 투자정신만큼이나 나태함의 탓이라고 보았다.

 

투기적인 성격은 다소 덜하지만 금융상 기법으로 볼 때 인상적인 것은 선물 future, 옵션 option 혹은 정부채권, 주식 상품에 대한 투자시장으로서, 이는 청어가 잡히기도 전에 청어를 사고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환어음의 지불은 반드시 암스테르담 은행을 통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때문에 암스테르담 은행은 환은행Weisselbank으로 알려졌다. 이 은행은 때때로 정화 species 예금액에 따라서 은화 rixdollars로 대부함으로써 채무자들이 유동성을 획득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 암스테르담은 외환 및 금과 은 거래에서 유럽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중상주의 시대에 독특하게도 네덜란드 전국의회가 귀금속의 자유로운 수출입을 허가했는데, 이는 결국 "부의 창출에 기여했다"

 

- 교육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노동, 자본, 기술 - 이것들은 수입이 가능하다-에 더하여 사회적 역량이 필요하다는 아브라모비츠의 신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역량에 대한 개략적이나마 유용한 지표는 교육년수이다. ...이 교육개혁은 호귈이 경제회복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새로운 조세법을 만들고 길드를 철폐한 후에 착수한 것이다. 프랑스가 엔지니어, 군장교 및 관료 양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과 반대로 호귈 개혁안의 강조점은 일반교육에 있었다.

 

- 고임금, 조세 및 부채

 

역사가들은 네덜란드 쇠퇴를 주거, 의복, 식품과 같은 생필품 가격에 부과된 높은 세금으로 인한 고임금 탓으로 돌린다. ...영국에서 이미 징세청부가 포기되고 정부의 직접 징수로 변화한 이후에도 네덜란드의 징세청부가 계속되었다....실제 징수액의 60%만 정부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징세청부업자들이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하바커크는 잘 알려진 그의 책에서 (19세기 미국과 영국의 기술), 미국에서의 발명은 고임금 때문에 노동절약적이었던 반면에 영국에서의 발명은 희소하고 비싼 자원을 절약하는 것이었다는 조심스런 견해를 제시했다. 무제한적인 노동공급 및 저임금을 상정하는 성장모형과 노동력의 부족이 결국 노동절약적인 혁신을 촉진시킨다는 신자유주의적 모형이 서로 상충한다는 사실을 보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일 모형에 근거해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쇠퇴의 시점

 

(네덜란드의 역사가 아이체마가 1652년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다음의 불평은.....) 과두집단 regent은 더 이상 상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해상에서의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자신들의 수입을 주택, 토지, 증권 renten에서 얻음으로써 네덜란드가 해상권을 상실하도록 방치했다. ... 무직자의 비율이 배로 증가하고 시골저택 보유자의 비율이 네배 증가한 것을 볼 때 쇠퇴의 시점이 이 보다 이른 시기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19세기 후반 네덜란드 공화국의 쇠퇴는 샤이먼 샤마의 저서에서...바다로부터의 소외, 암스테르담을 지나쳐 버리는 직교역, 길드, 구식 방식을 고집하는 조선업 숙련공들의 이민, 상업과 산업으로부터 금융으로의 이동과 그에 따른 상인들과 사업가들이 은행가들과 같은 규모의 부를 획득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분열적 효과, 사적 부와 공적 빈곤 사이의 간격과 그에 따른 과소비와 빈공층의 동시 증가, 산업도시의 쇠퇴와 걸인 및 유랑자들의 증가, 공직을 전통적인 과두지배 가문의 수중에 유지하기 위해...나누어주는 행태, 영란 전쟁에 따른 암스테르담 은행의 붕괴 및 암스테르담 시의 파산 직전 상황 등등이다.....노령기에 들어선 사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황금시대에 대한 강한 향수가 있었다..... 연방주의는 황금시대 동안에는 대단히 훌륭하게 작동했지만 변화하는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비대해진 늙은 공화국의 지방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체제가 필요했으나 그것을 이루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명력과 에너지를 가진 젊은 국가들은 오래된 독점권에 도전하지만, 늙은 국가들은 이러한 도전에 혁신적으로 대응할 역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