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강대국 흥망사, 찰스 P. 킨들버거, 주경철 옮김, 까치, 1996 (2004)
[4.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점점 더 동쪽에, 제노바는 점점 더 서쪽에 치중했다. 동쪽 지역에서는 제노바가 북쪽, 특히 흑해 방면에서 주로 사업을 벌인 반면, 베네치아는 남쪽의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주로 사업을 했다.
상업혁명은 한편으로 조선업, 다른 한편으로 재정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두 도시 모두 경작 가능한 땅이 없으므로 피렌체 식의 봉건주의를 피할 수 있었고, 그 대신 선출된 관리를 둔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유지했다.
노수들을 사용하여 조종이 용이한 갤리선은 값비싼 상품들을 수송하는 데에 쓰였으며, 흔히 정규항로에 투입되었다. 라운드 십은 1300년경에 한자동맹 지역의 코그선을 본따 만든 다음 계속해서 개량되었다...조타용 노 대신 선미 중앙타가 사용되므로써 배를 더 크게 건조할 수 있게 되었고, 더 강한 삭구와 의장, 개량된 항해수단을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 1300년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 동안 상업혁명은 항해혁명을 불러왔다.
베네치아의 노수들은 육상에서는 흔히 길드 소속이었으나, 전쟁이나 해적 소탕의 필요때문에 베네치아 평의회에 의해서 소집되면 배에 탔다. 그러나 곧 전문화된 군대와 병기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더 엄격한 훈련을 해야했기 때문에 선원들이 상인으로서 행동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원들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해서, 자주 나라 밖으로 나가고, 반란을 일으키고, 선불제로 일하는 미미한 존재가 되었다. ....흑사병으로....선원부족이 더욱 심각해...갤리선을 고용....제3, 4차 제노바와의 전쟁은 경직되기 시작하던 계층구조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심지어 엘리트 계층 내에서도 계급구분선과 금융이익을 따라서 균열이 생겼다.
페르낭 부르델은 도시의 중개무역으로부터 테라페르마의 토지로의 이동이 상업쇠퇴의 징후라는 설에 의심을 표했다...... 피터 버크는 베네치아의 토지 소유주들이 사업가라기 보다는 지대 수취인으로서 토지에 관심을 가졌다는 더 일반적인 믿음을 진술하고 있다. 그는 베네치아가 영국이나 프랑스, 에스파냐의 성공적인 상인들이 그러했듯이, 부르주아 귀족 지위를 추구한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행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연된 것이 놀랄만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해운업에서 공직으로 관심을 돌렸다. 토지와 공직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귀족신분에 걸맞는 것이었다.
-제노바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노바는 부자와 빈민 사이에 소수의 부르주아 중간계층이 끼어 있는 도시였다....귀족들은 서서히 무역에서 금융으로 물러났다. 이 전환이 자연스러운 위험부담 회피의 결과였는지 아니면 외국과의 경쟁에 대한 반응 때문이었는지,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는지 결정하기는 어렵다.
- 밀라노
수출 주도형 성장으로 자극을 주었던 해외무역은 밀라노가 해외시장과 이탈리아 내에서 모든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쇠퇴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 길드 제도 때문에 초래된 고임금과 도시의 과소비가 부분적인 원인으로 작동용하여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자 부자들로서는 그들의 자본을 도시로부터 보다 활력있는 지방으로 옮기는 것이 좋은 전략이 되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잇따른 쇠퇴는 여러 원인들이 서로 연결된 결과였다. 즉 무역 및 생산과 해운의 약화, 해외시장에서의 독점의 붕괴, 목재 부족, 무역과 선박업에서 금융과 금리 생활자, 토지귀족, 과소비, 공직을 통한 위신추구 등으로의 이동....이런 각각의 범주 안에서 다니 많은 요소들을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베네치아의 상대적 쇠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트투갈과의 향신료 경쟁, 영국과의 모직물 경쟁, 네델란드 및 영국과의 조선 경쟁이었는데, 이것들이 베네치아의 "지위, 제국" 그리고 헤게모니의 상실로 이어졌다. 철 지난 표준에 매달린 것은 길드와 정부 모두의 실수였으며, 이야말로 태도의 경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길드나 노동자들의 입장, 생산성의 균등화 등이 이미 주어진 상황에서 고임금에 대해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5.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은 주어진 국가의 쇠퇴가 상대적이냐 절대적이냐, 즉, 국가의 수입과 부가 실제로 감소하느냐 하는 것이다.
- 포르투갈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이해관계는 갈려 있었다. 개인 정착민들은 중국, 일본, 후에 인도네시아가 된 섬들, 인도 등의 현지 무역에 전념했고, 국왕과 귀족은 각기 관세수입과 상업수익에 관심을 두었으며, 카톨릭 교회는 이교도들에게 '참 진리'를 설파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숫적으로 적은 배와 형편없는 선원이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대략 1640년대까지 영국과 네덜란드의 거센 도전에 굴하지 않고, 흐르무즈를 제외하고는 아시아 전역에 전진기기들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견해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힘은 식민화 성공에 힘입은 것이다. 네델란드인들은 (혹시 살아남게 된다면) 6년 후에 자기 고국으로 되돌아간 반면 포르투갈인들은 현지인과 결혼하면서 해외에 종신토록 정착했다. ....더 나은 선박, 더 나은 해군전략, 더 나은 상업조직을 가졌고 또 덜 부패했음에도, 네덜란드가 아시아-유럽간 무역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내는 데 60년이나 걸렸으며, 브라질에서는 결국 그들을 몰아내지 못했다. 이론적으로는 아주 쉽게 해냈어야 했음에도 말이다.
포르투갈...쇠퇴의 원으로서...1625년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영국인들이 카리브 해 연안에서 사탕수수와 담배 경작 붐을 일으키면서 그 가격이 떨어진 것, 그리고 특히 1703년 영국과 포프투갈 사이에 체결된 메수엔 조약을 들 수 있는데...포르투갈을 약화시킨 다른 요소는 1580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 의해 이 나라가 합병당한 것을 들 수 있다.
- 에스파냐
(역사가 관심을 끈다는 것 자체가 벌써 노쇠의 징후이다.)
카스티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는 상업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도시로서, 다른 지역들로부터 곡식, 관세, 지대를 긁어 모았을 뿐 에스파냐 내륙에 자극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마드리드도 기생적이었다.
에스파냐 쇠퇴의 원인을 다루겠으나...우선 많은 역사가들이 그 원인의 하나로서 해운업 관련 요인을 들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1566년에서 1603년 사이의 해운업의 쇠퇴, 트레이크-호킨스의 카디스 공격과 무적함대의 패배로 인한 상인들의 자신감 상실, "17세기 쇠퇴의 근본적인 이유로서 해상 무역이 외국인들 수중에 떨어지게 된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이는 물론 국력은 (어느 정도는 경제성장도) 해군력에 의존한다는 미국의 해양 전략가인 머핸의 주장과 일차하는 것이다.
은 유입이전부터 유럽 전역에 물가상승 현상이 있었다고는 해도, 은 유입 때문에 에스파냐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물가보다도 바른 임금인상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쇠퇴시켰는지는 의문이다.
18세기 에스파냐에 대한 설명에서 리처드 허는 17세기말 이래 불경기와 인구감소에 시달린 이 나라가 해외사업가들과 노동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여겨졌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외국상인들이 아메리카와의 무역을 지배했다.
1580년에서 1620년까지의 기간에 에스파냐 경제를 쇠퇴시켰던 일련의 요소들은 이미 언급되었다. 해상 경쟁력 상실, 전사기질, 노동에 대한 경멸과 이달고 신분의 집착, 유대인 및 무어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제노바인-"백색 무어인"이라 지칭된-에 대한 강한 적의, 전쟁들, 그 재정부담, 인플레이션, 종교재판소, 이전에는 도움이 되었던 길드 제약, 인구학적 "부양력과 회복력"의 상실, 농지 희생을 댓가로 치른 메스타 지원, 무어인 축출과 교회 매각에 의한 토지 취득 후 양도 불능 소유권 mortmain을 통해서 대물림하는 대귀족들과 농사로서 생계를 잇지 못하고 전염병에 몰려 도시로 가서 걸인이 된 농민 사이의 막대한 격차 등.
17세기 경제학자들은 "장자 상속제, 영구 양도, 방랑벽, 산림황폐, 성직자의 숫적 비대, 육체노동과 공예에 대한 경멸, 분별없는 자선, 화폐혼란과 강압적인 징세를 비난했다." 그리고 기술교육, 장인들의 유입, 화폐안정성, 관개사업 확장과 국내 수로의 개선을 제안했다. 해밀턴의 표현에 의하면 역사상 그처럼 훌륭한 진단을 한 적도, 또 그 건전한 충고들을 그처럼 철저히 무시한 적도 거의 없었다.
카를로스 3세의 후원하에서 무역과 산업에서 부르주아 중간계층이 형성되고 프랑스로부터 계몽주의가 유입되는 데 대해서, 교회와 귀족이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쳤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입, 프랑스에 대항한 영국의 전쟁 와중에서 1808년부터 1820년대 초까지 에스파냐의 식민지는 반란을 일으키며 떨어져나갔다. 상관 factory의 붕괴는 노동자들을 방출했고 이들은 농부들과 함께 대도시로 달아났다.
봉건주의에서 근대 자본주의로의 "실패한 이행"은 원래 프레더릭 크란츠와 호엔베르크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차라리 18세기 에스파냐에 더 잘 들어맞는 표현이다.
펠리페 2세 치하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세계 경제의 선두를 점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선두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그것은 충분조건은 아니었고, 아마도 대부분은 필요조건도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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