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순례길에서 양코백이들이 부러웠던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첫째가 날붙이 연장이다.
빅토리녹스의 맥가이버 칼은 조금 심심하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게 숙소에서 요리를 해야 할 때이거나,
포도주 잔을 앞에 두고 치즈를 잘라야 할 때이거나,
혹은 순례길 어느 분수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오렌지 껍질을 벗기거나 할 때,
아무래도 조금 나은 칼이 필요할 듯 했다.
숙소에서 부엌을 지저분하게 쓴다고 나랑 싸웠던 베르셀로나에서 온 할아범도
그 놈의 칼을 요령껏 들고 치즈를 먹을 때만은 조금이나마 멋져 보였다.
해서 접이칼이 아닌 손자루칼을 갖고 싶었다.
가능하면 날의 길이가 짧을 것, 허리 벨트에 맬 수 있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좀 멋져보일 것.
마지막 조건은 나의 신체적 조건과 결합되어야 하는 부분이라 조건이라 부르기는 거시기하지만.
며칠을 고민하다 노르웨이의 칼, 헬레에서 만든 베스에겐을 들였다.
절로 웃음이 배어나는, 남자의 칼.......
칼자루 슴베가 쥐꼬리 슴베 rat-tail tang인지라 약해 보이는 구석이 없진 않지만,
내가 바깥에서 장작 팰 것도 아닐 것인지라.
커티샥 같은 양주병만 저런 원통 종이곽에 담기는 줄 알았는데, 칼도 이리 배달되었다.
관리용 천에 새겨진 Helle 상표는 어디 하청 공장에서 찍은 듯 앞 쪽의 잉크가 번져 있었다.
그래도 가죽 칼집은 날렵하여 위안이 된다.
이 칼을 보는 순간 생각나는 바이런의 시 한 구절,
"칼을 쓰면 칼집이 헤어지고,
마음을 쓰면 가슴이 헐고...."하는.
칼자루는 뒤틀린 자작나무라 해야 하나 박달나무라 해야 하나. 암튼 아름다운 자연 무늬에 단단함까지 더했다.
사실 이 나무자루의 색감 때문에 나는 헬레의 다른 칼을 두고 베스에겐을 택했다.
자세히 보면 아주 조그마한 핀홀 느낌의 흠집이 잡혀있다. 자연목이라 그런 까닭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나는 항상 뒷면이 궁금하다. 카탈로그 상으로는 칼집 뒤쪽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죽 칼집의 끄트머리는 박음질을 않았다. 빗물이 빠져나가는 drain hole 이리라.
칼집은 자세히 보면 박음질 쪽에 가죽 졸대 한 겹이 더 들어가있다.
칼을 넣으면서 박음질 실을 끊을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디테일일 것이다.
저런 디테일이 나를 항상 주눅들게한다.
날이 두꺼워 사과를 깍을 수 있을지는. 나의 손놀림이 그에 따라주어야 할 지 모른다.
서투른 목수가 연장 나무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적어도 제대로 된 목수는 연장을 제 치에 맞추어 사용하는 까닭이다.
곽을 여는 순간부터 내내 나도 모르게 웃음짓는, 웃음짓게하는 그런 날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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