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대기근 飢饉, 조선을 뒤덮다 - 지주와 빈농의 관계를 신분제와 함께 유지시켜 극복한 자연재난?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28. 22:36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25쪽) '17세기 위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유럽사회를 중세 봉건제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이끈 배경으로 보기도 한다. ...17세기 위기가 18세기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따라서 17세기를 연속의 시대가 아니라 단절의 시대로 해석하여 16세기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로, 17세기를 '위기의 시대'로, 18세기를 계몽사상과 혁명의 시대로 삼은 데 있다.

 

(29쪽) 13세기에 몽고족이 심각한 가뭄을 겪으면서 고려를 포함한 전 세계를 침공했듯이, 17세기에는 만주 대륙의 추위로 만주족이 중국으로 진격하고 조선을 침략했다. 소빙기 기후로 동아시아에서 명.청 교체, 왜란, 호란 등 침략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조선이 그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41쪽) (조선이 경신대기근-1670년 현종11년 술년, 1671년 현종 12년 해년) 대기근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대해서) 지방양반들은 지역 차원의....향약이나 동약을 만들고 그 하부조직으로 의창이나 의계를 두어 기근 구제에 나섰다. 특히 17세기 말에 주자 朱子의 사창 社倉을 받아들여 곳곳에 마을 단위의 사창이 들어섰다....이러한 '선행'이 있었기 때문에 지주와 빈농의 관계를 신분제와 함께 유지할 수 있었고, 어지간한 기근도 극복할 수 있었다.

 

*** 이러한 기술이 얼마나 실증적 근거에서 나왔는가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인간 생명이 모질다는 점에 비추어본다면 따로이 지방양반의 '선행'이 없더라도 버틸 곳은 버티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 곳은 역사의 기록에서 지워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지간한 기근이 '극복'된 것이 아니라 (민초들의 생명을 담보로) '흘러간 것'이라는 것이 나의 확증 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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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쪽) (1670년 청나라 칙사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왔을 때)...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온 사헌부 장령 조세환이 칙사와 조선 관리 사이에 오간 뇌물에 대해 중국에서 들은 것을 상소로 폭로했다....청나라 역관이 말하기를 '이번에 동쪽에 갔으르 때 우의정을 협박하여 많은 은화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저들이 오면 공용의 물건을 가지고 뇌물을 주고 저들이 가고나면티연히 말이 없으니...

 

(75쪽) 조세환이 폭로한 폭탄성 풍문은 국가의 위신과 대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시비를 불러....임금은 조세환의 관작을 삭탈하고 (당시의 좌의정) 허적은, 설령 국가가 은을 뇌물로 준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일선이 이 사실을 반드시 굳게 숨길 것이고, 이는 필시 역관들이 빈말을 지어내 조세환을 속인 것이라고 하여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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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절은 지금의 어떤 상황에 대입시켜도 동일한 문구가 됨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나마 인터넷과 개인 동영상 방송이 있어 사실에 좀더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긴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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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쪽) 일본인들은 (왜관)의 이관 대상지로 웅천 외에 부산성, (동래) 초량, 다대포, 거제, 순천 등을 지목했다.조선 정부는 순천을 허락하면 호남 조운의 길이 끊어지며, 웅천과 거제를 허락하면 통영이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조선정부는 초량을 후보지로 지목했다. 일본인 기술자 150명과 조선인 기술자가 공동으로 작업한 이설공사가 착공된지 3년후인 1678년 (숙종 4년)에 완성되어...이후 200년 가까이 조선과 일본의 외교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 이설 공사를 단행한 세력이 바로 남인이다.

 

(91쪽) 조선 조정에 관해서도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상세히 기록했다.

 

(길이 6m 폭 30cm를 상회한 혜성은 연일 강한 소리를 내고 빛을 발산했다.) 이 사건은 조정에 큰 동요를 일으켰는데, 왕은 모든 항구와 병선을 정비하도록 하고 모든 요새에 군량과 탄약을 공급했다...왜냐하면 청나라에서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나 (92쪽)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에도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백성들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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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항구와 병선을 정비토록 하고 군량과 탄약을 공급했다는 하멜의 표현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위치였는지도. 그리고 그 정도의 국가 체제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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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쪽) 현종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고 신하의 조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임금의 하교가 떨어지지 무섭게 3정승이 차례로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임금은 모두 물리쳤다....임금과 신하의 이러한 일은...의례적인 것이었다...하늘이 이상하면 인간이 자숙해야 조화를 이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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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료의 행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천문현상에서 변고를 연상시키고 정치와 연결시키는 것이야 시절의 문제라고 치부하더라도, 사표를 낸다는 무책임한, 혹은 사표를 낸 연후에 자신들의 가문을 먼저 챙기겠다는 의도는 아닌 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상황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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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쪽) 하늘에서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1670년 새해 시작과 함께...(96쪽) 속은 붉고 겉은 푸른 햇무리 (일훈 日暈)가 관측되었다. ...(97쪽) 1월 9일 새벽 4시 무렵, 북동방향 하늘에서 큰 불덩어리만 한 유성이 평안도 중화 땅에 덜어졌는데...(100쪽)...하늘의 이변에 이어 땅의 이변도 함께 나타났다. 전라감사는 1월 4일과 5일에 도내 영암과 영광에서 보름 전 밤에 대문과 창문이 떨리는 지진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101쪽) 2월에 경기도 교동과 통진에서 경상도 안음과 거창에서 연이어 지진이 발생했다. ...마침내 8월 21일, 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진도가 상당히 (102쪽) 높은 지진이 삼남 지방 도처에서 동시에 관측되었다. ...전염병이 극성을 부리던 12월에 또다시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에서 지진이 관측되었는데, 역시 전라도가 가장 심각했다....아무래도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의 앞날이 심상치 않을 것 같았다. 

...지진이 일어나면, 정부에서는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 도내 중앙에서 해괴제를 지내게 했다.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해괴제라는 제사를 지낸 것이다....12월 지진 이후 강화도에서 해일이 일어 2m가 넘는 파도가 쳐 각처의 둑이 무너졌다. 

 

(113쪽) 1년 농사의 생명이 달려있는 4월과 5월이 가뭄으로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임금이 담화문을 발표...자신이 즉위한 이래 천재가 없는 해가 없었는데, 금년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매우 참혹해 봄부터 여름까지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과 보리를 수확할 수 없고 파종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은 가뭄 피해가 이렇게 참혹하니 백성들의 일을 언급하면 그 아픔이 자신의 아픔과 같다고 답했다.

 

(114쪽) 조선 정부는 가뭄에 대비해 제언사 (堤堰司)라는 관청을 두어 수리시설을 관장하게 하고, 저수지를 축조해 물을 가두고 제방을 쌓아 물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혹심한 봄 가뭄은 ...비를 내려주라고 하늘에 청하기 시작했다. 오방색의 용을 그려 오방위에 걸게 했다. 부채나 가죽북 등의 사용을 금하고, 북문을 열고 남문을 닫게 했다. 부채질은 비구름을 날려버리고 양이 성하면 음, 즉 비가 차단되는데, 가죽이나 남쪽은 양 陽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치르고 한숨을 돌린 예조는 3월 20일에 가뭄의 실상을 임금에게 아뢰면서 기우제의 거행을 건의했다. ...(115쪽) 기우제가 효험이 있었는지 비가 오기 시작했다...그런데 비는 찔끔오고 말았다. 이에 임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닥칠 농사를 크게 염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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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대왕 행장 行狀의 구절을 옮겨보자. 경신기근의 다다음해이다. 

 

계축 14년 정월에 경기 지방이 재해를 입었다 하여,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大同米)를 차등있게 감하라고 명하였다.

2월에 명을 내려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조적의 수를 뽑아내어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팔도의 감사와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 등의 유수(留守)에게 유시하기를,

 

"내 생각건대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한다.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는 진실로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히 여기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옛날 제왕들은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알고 농사짓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의 빈풍(豳風)과 《서경(書經)》의 무일(無逸)이 어찌 후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종(祖宗)에서는 백성을 잘살게 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먼저 전제(田制)를 바르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농서(農書)를 번역하고 풀이하여 가르치고, 토지를 이미 시험해 본 방법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지어서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였으며, 또 농사를 권장하는 글을 반포하는 등 무릇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여러모로 심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때에 쌀이 붉게 썩고 돈꿰미가 썩어 셀 수 없는 것 과 당(唐)나라 때에 쌀 한 말 값이 3전이었던 것 도 그다지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었다.

그런데 과인에 이르러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수재와 한재가 없는 해가 없었고, 기근의 참혹함이 지난해에 와서 극도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노약자들은 구렁텅이에 죽어 뒹굴고 백골이 서로 잇따르고 있으나 이주시킬 만한 곳이 없고 구제할 만한 곡식도 없다. 내 이 때문에 잠자리가 편치 아니하고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으므로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하는 계책을 얻어 위급한 지경에 이른 백성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만 있게 되어 조종(祖宗)께서 3백 년 동안 길러온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지고, 뽕나무와 삼이 있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으니, 아,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연유를 구명해 보면 비록 연운(年運)이 좋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나 실로 사람이 한 일이 미진하여 그런 것이다. 만일 옛날처럼 3년을 농사지어 1년 먹을 것이 축적되고 9년을 농사지어 3년 먹을 것이 축적되었다면 떠돌거나 죽는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대체로 농사에서 힘써야 할 일은 때에 맞추어 하는 것과 힘을 써서 하는 것 이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미 제때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고 김매는 일에도 힘을 쓰지 않는가 하면, 제방을 쌓아 관개(灌漑)하는 이로움을 폐지한 채 수거(修擧)하지 않고, 거름을 주고 김매는 일도 대부분 소홀히 하여 힘쓰지 않고 있다.

아, 사농공상 가운데 오직 농민이 가장 괴로움을 겪고 있다. 추울 때에 밭갈이 하고 더울 때에 김매는 등 해가 다 가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데, 고을의 관리가 조세(租稅)의 상납을 독촉하는 정치가 소요를 일으키고, 장사꾼과 놀고 먹는 무리가 또 뒤따라 좀먹고 있으니, 어떻게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지금 봄날이 따뜻해져 토맥(土脈)이 처음으로 열리었으니, 보습을 손질하는 정월은 이미 멀어지고, 밭갈이하는 2월이 문득 박두하였으므로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 우역(牛疫)이 치성해지면서부터 백성들은 어깨가 붉게 문들어진다고 탄식하고 있다. 날카로운 보습을 제대로 쓸 수가 없으므로 흙을 일구는 밭갈이를 장차 폐지하게 되었다. 옛날 왕공(王公)이 경작하는 예를 몸소 행하여 천하의 백성을 거느렸다. 내가 경사 대부(卿士大夫)와 함께 옛날의 제도를 본받아서 사방의 주창이 되려 하였으나, 이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실로 불만스럽게 여긴다. 아, 큰 흉년을 치른 전지가 황폐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살아갈 대책이 막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마하는 도리는 급히 해야지 느슨히 해서는 안 되며 권장하는 방법은 서서히 해야지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와 함께 다스리는 자는 오직 방악(方岳) 뿐이며, 백성과 가까운 직책은 수령만한 사람이 없다. 경들은 나의 명농(明農) 의 뜻을 체득하여 수령들에게 포고하여, 밭두둑을 출입하되 여리(閭里)를 소요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전야(田野)를 살펴 보되 백성의 농사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라. 저수지 중에 관개(灌漑)할 만한 것은 수리하고, 도랑 중에 소통할 만한 것은 소통시키도록 하라. 백성의 힘이 넉넉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고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여, 갈고 씨앗 뿌리는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김매고 북돋우는 시기를 어기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여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가 모두 일구어지도록 힘쓰고 놀고 먹는 백성이 다 농사에 돌아가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백성이 본업을 즐거워하여 태만하지 않고 힘을 다해서 위로는 경상(經常)의 부세(賦稅)를 바치고 아래로는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소원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백성의 생업은 농사에서 안정되고 나라의 근본은 반석처럼 튼튼해질 것이다. 경들은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고 깊이 유념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이 긴 문장을 읽고도 도대체가 조선 정부가 무엇을 하고자 함인지 알기 어렵다. 우선은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하고 (왕 자신은 책임을 다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도 실행이 아니라 생각으로만), 태만한 백성 탓 (혹은 농사에 무지한 백성 탓)과, 그리고 당연히 징수해야 할 세금을 얘기한다. 나머지는 입에 발린 (목에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등의) 의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다한 후 '행동'으로 옮길 무엇인가를 알기 어렵다. 나는 이를 일러 인재 人災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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