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그늘 아래에서

대기근 飢饉, 조선을 뒤덮다 (2) - 사회안전망?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24. 11. 30. 14:34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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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 용어와 조선의 대응을 정리해 보면

가뭄 - 기우제 祈雨祭

홍수 - 기청제 祈晴祭

병충 황충 蝗蟲 - 포제 酺祭 - 메뚜기·나방 등 농작물의 충해가 심할 때 이를 기양(祈禳)하기 위하여 포신(酺神)에게 지내는 제사

전염병, 당나라에서 온 병 당학 唐瘧 -  여단  厲壇 에서 여제  厲祭

소전염병 牛疫 - 마단馬壇에서 牛祭

괴변 (지진, 절집 부처의 땀 등) - 해괴제解怪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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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쪽) 사실 (농본 정책을 표방한) 조선정부는 국초부터 송금 松禁, 주금 酒禁, 우금 牛禁 등 3 금이라 하여 소나무를 베고, 숨을 담는 것과 함께 소를 잡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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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금의 통제를 실질적으로 백성이 대상이 될 뿐, 양반이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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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쪽)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이... 눈뜨고 굶어 죽는 것보다 소를 잡거나 팔아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중요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안 일부 신하들이 도살 금지령을 완화하자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완화를 주장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균관 노비들은 현방 懸房이라는 정육점을 독점 운영해 생계를 꾸려가고, 법을 집행하는 법사 (法司, 형조, 한성부, 사헌부)의 아전들은 도살자에게 속전 贖錢이라 하여 체형 대신 벌금형을 부과해 자신들의 급료를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살을 금하자 이들의 살 길이 막혀 버렸다. 특히 독자 재원이 없어 도사 屠肆 속전에 크게 의지해온 한성부는 더더욱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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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세력이 무언가 백성을 위하는 척 정책을 요구할 때, 실질적인 이득이 누구에게 돌아갈 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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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쪽) 기후 변화가 장기화되면서 대재해는 조선을 위협했다.... 여기에 왜란, 여진 방어, 나선정벌, 호란, 북벌 계획 등으로 재정은 악화되었다. 잇단 재해와 재정난은 17세기 조선이 직면한 대기근의 주요 원인이었다. 

 

(166쪽) 굶주림을 이겨내는 데에 곡식과 함께 소금만 한 것이 없다. 바닥난 곡식을 대신해 초근목피를 먹을 때 소금을 넣어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소금을 굽는 바닷가와 섬사람들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이리저리 유랑했다...

(168쪽) 대기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까지 상륙하고 말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남의 집에 기숙하며 도성을 지키던 군인들이 식량이 바닥나자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그 수가 7-8월 두 달 동안 무려 1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휴대한 조총이나 군장비가 유출되면 더 큰 사태를 초래할 것 같아 수습하여 무기고에 보관하라는 명령을 내질 정도였다.... 정부는 비축곡을 방매해 서울의 곡물 수급사정을 조정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170쪽) 사재기를 한 '모리배' 혹은 '간사한 무리'로 표현된 자는 누구일까? 그들은 다름 아닌 난전 亂廛이었다. 난전은 시전과 경쟁을 벌이는 자유상인으로 17세기 초기부터 활발한 상업활동을 펴고... 정부는 난전 대문에 피해를 입고 있는 시전을 보호하기 위해 3년 전에 난전 금지령을 내렸고, 금난전권 禁亂廛權이라 하여 시전과 형조가 난전을 적발.처벌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난전은 단속을 피하며 상행위를 계속했다. 이는 난전이 궁가 宮家나 재상가의 사람들이고 이들 유력층이 난전을 비호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171쪽) 사안을 다르지만, 대기근을 돈벌이로 여긴 사람들은 지방에도... 지방의 수령들과 향리들이 진휼 진휼을 이용한 것이다. 

 

(184쪽) (1670년에 이어 1671년의 겨울에 아사자가 급증하여)... 참혹한 죽음은 왜놈들이 7년 동안 유린한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연로한 어르신들의 말) 했다.

 

(229쪽) 이처럼 강화도, 남한산성, 평안도의 비축곡을 집중적으로 진휼에 투입했다. 호란 이후 국가 비상시 임시 수도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튼튼한 방어기지를 조성하고 방대한 비축곡을 축적하고 있었다. (230쪽) 그리고 국방의 요지이자 대청 외교를 담당하는 평안도에도 관현 管餉이라는 비축재를 막대하게 조성하고 있었다. 바로 이 비상용 비축 물자를 조운선으로 실어와 진휼뿐만 아니라 국가 재원으로 사용한 것이다. 

 

(231쪽) 1671년 1월, 서울과 지방 모두 진휼소 설치를 완료했다. 진휼소는 진제소 賑濟所, 진소 賑所, 진장 賑場이라고 하고, 죽을 쑤어 (설죽 設粥) 제공한다고 하여 (232쪽) 보통 죽소 (粥所)라 불렀다. 

 

(240쪽) 진휼소가 실효성을 거두는 데 한계가 있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 외에는 기아자를 구제할 다른 방도가 없어 계속 운영하였다. 그렇다고 무한정 진휼소를 운영할 수만은 없었다. 법적 기한이 봄보리 수확 때까지이기 때문이다....(241쪽) 영의정 허적과 의정부 좌참판 민정중은 국가의 형세가 재정 고갈로 지탱할 수 없는 형편이니 진휼소를 남겨두기가 어렵다는 의사를 밝혔다. 

 

(245쪽)...(서울의) 진휼소를 당장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도 적지 않았다. 그해 봄 농사도 우박과 서리로 완전히 흉작이라서 결코 끝까지 구제할 가능성이 없어 어차피 죽어갈 것이니, 괜히 양곡만 낭비하리라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차라리 지방에 더 신경을 쓰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254쪽) 기근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이들을 살리는 길은 시급히 식량을 제공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세금을 경감해 그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 당시 백성들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 인신에 부과하는 군역, 가호에 부과하는 공납 등 세 가지 세금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의 근간이 이른바 조용조 租庸調다....(255쪽) 세금 가운데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은 군역 軍役이었다. 조선의 양인 남자는 만 16세가 넘으로면 60세가 될 때까지 각급 관아와 각종 군영에 배속되어 군역을 져야 한다. 군역 대상자 가운데 일부는 번상군 番上軍이라 하여 현역으로 입영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군보 軍保라 하여 군포 두 필만 납부하면 된다. 한 가정에 보통 군역 대상자가 두 명에서 네 명 정도 되기 때문에 군포는 무거운 부담이다.....(257쪽) 납세자들에게 세금 중 가장 무거운 것이 군포였다. 19세기에 환곡이 문제가 될 때까지 그랬다.

 

(260쪽) 군포 감면 문제를 막 타결하고 나자, 바로 이어 토지세 감면론이 제기되었다. 토지세는 대동미, 전세, 삼수미 등 3세가 있다. 대동미 大同米는 선혜청에서 봄과 가을에 1 결당 각각 쌀 6두씩 모두 12두를 거두어 각 사의 공물가로 사용하는 것이다.... 대동미는 본래 가호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공물을 전세화한 것이기 때문에 대기근으로 가호가 몰락하면 당연히 감면 대상이 된다. 

...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전세 田稅였다. 모든 토지는 이념적으로 '왕토 사상'에 입각해 국가소유라서,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지대 地代, 즉 전세를 (261쪽) 납부해야 하고.... 재정적자를 우려한 호조가 전세 감면에 난색을 표하며... 호조의 재원은 대부분을 전세로 충당하는데, 양전 量田을 오랫동안 실시하지 않거나 여러 기관과 궁방에서 면세전을 다량 보유해 수세지가 대폭 줄고, 영정법 永定法으로 1 결당 세액이 4두로 내려 전세 수입이 예전만 못하였다.... 한 해에 들어오는 전세가 10년 전만 해도 12만 석 정도였는데, 근래에는 겨우 10여만 석에 불과했다. 이마저 군량미로 7,8만 석을 떼어주고 나면 관리 녹봉과 종묘 제사 등에 쓸 것은 3만여 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죽는소리를 했다. 

 

(264쪽) 농가 부채란 농민들이 종자와 식량 용도로 관아에서 빌린 환곡 還穀을 말한다. 환곡을 회수해야 군량을 채울 수 있고 기근에 대비할 수 있다.... 비변사의 하달로 환곡 이자를 회수하는 작업을 전면 중단했다. 

 

(270쪽) 근래 조선이 만성적인 재정적자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여기에 1670-1671년 2년간 수만 석을 진휼에 쏟아부은데 반해... 지난해 분 전세가 평년의 10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에...

(272쪽) 해가 저물어갈 무렵, 김좌명이 국가지출을 줄이는 방안을... 동전을 주조하자고 건의했다. 동전 주조를 주장한 의도는 상업진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수입확보에 있었다. 일본에서 구리가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주조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임금도 허락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김좌명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8년 후 숙종 때 남인 정권하에서 대기근으로 구멍 난 국고를 메우기 위해 상평통보를 발행했다.

 

(273쪽) 조선왕조가 군사비에 투입한 재정규모는 막대했다. 양란을 겪은 후 군영이 늘어나고 모병제를 실시하면서 더더욱 증가했다.... 그렇지만 임금, 서인, 남인의 생각이 각각 달라 군사비 감축 문제는 쉽게 해결 방안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인조 이후 서인과 남인이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자파의 세력 기반으로 삼기 위해 새로운 군부대를 각기 창설했다. 그 결과 현종 즉위 시 중앙군으로 국왕을 경호하는 내삼청 內三廳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도성을 호위(274쪽)하는 훈련도감과 어영청, 그리고 도성 외곽을 수비하는 총융청과 수어청이 있었다. 현종은 여기에 정초청 精抄廳과 (서인의 견제를 물리치고 창설한) 훈련별대 訓練別隊를 잇따라 신설해 궁궐과 도성을 지키도록 했다. 

  이들 중앙군은 이자를 불리거나 군보를 끌어 모으고 둔전을 설치해 운영비를 확보했다. 따라서 중앙군은 국가의 수입원을 깎아 먹으면서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무겁게 하는 존재였다. 

 

(277쪽) (송시열계 서인) 사간원 정원 윤계가 올린 장문의 장소는... 지금의 문제는 양병養兵이 원인이며, 전에 3천에 불과하던 도성 군사가 온갖 명목으로 신설되어 수만에 이르러 국가 재정이 모두 그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278쪽) 임금은 훈련도감을 감축해 쌀 1만 석과 무명 200동을 절감하고 휘하 군졸 없이 놀고먹기만 하는 어영청의 장교도 감축했다.... 훈련별대와 정초청은 숙종 때 합쳐져서 금위영으로 탄생해 궁궐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 

 

(283쪽) 진휼에 쏟아붓고 세금을 탕감하느라 생긴 국고 구명을 메우기 위해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를 감축했지만... 재물을 받고 신분과 관직을 파는 납속 納粟이 활용되었다.  

  왜란과 호란 때 군량미와 복구비 조달을 위해 시행했던 납속은 인조와 효종 때부터 진휼비 확보를 위해 시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종 초기에 연이어 기근이 들자 정부는 <모곡별단>을 제정해 대대적으로 납속을 실시했다. 

(284쪽) 정부는 9년 전의 예에 따라 영직 影職, 허통 許通, 보충대 補充隊 첩문, 승통정 僧通政 첩문을 내려주었다.

 

(288쪽) 납속에 응한 자들의 목적은 신분에 따라.... 양반은 품계와 관직을, 서얼을 허통 許通을, 액외 교생 額外校生 -정원 외의 향교의 교생-은 면강을, 양인은 면역 免役을, 노비는 면천종량免賤從良을 얻는 데 있었다. 

 

(293쪽) (청나라로부터의 쌀 수입론은)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해 1년여 지난 1675년 7월에 청의 미곡을 도입하자는 논의가 다시 일었다.... 그 후 1695년부터 내리 3년간 '을병 대기근'이 찾아왔다..... 마침내 조선정부는 1697년에 청나라에 양곡 지원을 요청했다. 첫 논의 이후 30년 가까이 지나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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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과 그 사후 대처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을

사회안전망이란 근대적 용어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윤색이며 일정한 왜곡의 우려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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