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관-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지배에 관한 잠언,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진석용 옮김,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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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어떻게 오는가? 어정쩡한 관념과 추상에서가 아니라 경험의 검증, 실증을 통한 과학으로 정립된 것일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 책이 씌여진 1620년은 광해군 12년에 해당한다.
한 시대가 아리스트텔레스를 극복하고자 할 때,
다른 한 시대는 사대부들이 토지와 사적 폭력에 기대어
소위 목민 (牧民, 백성을 나귀로 여겨 다스림)을 하기에도 바빴을 터였다.
마태복음의 구절처럼, 낡은 것에 새 것을 더하거나 잇대어 깁는 (제1권 31) 것이 아닌, 베이컨의 말마따나,
진리는 특정한 시대가 누리고 있는 불확실한 행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자연과 경험의 빛'으로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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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이 : 과학시대의 전망
(11쪽) <신기관 Novum Organum>이라는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인 <기관 Organum>에 대한 대항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옮긴이 주: 라틴어 Organum은 영어의 organ, 우리말의 기관 機關에 해당한다….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를 이 장치 속에 넣으면 지식이 생산된다는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의 논리학에서 ‘organ’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다…. 논리학을 지식의 생산 ‘기관’으로 여긴 것)
머리말
(33쪽) 그러나 옛날 고대 그리스인 [초기의 자연철학자]들은 …(34쪽) 연구 대상을 끝까지 부여잡고 자연과의 대화를 계속했다.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토론으로가 아니라 경험으로 결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고 역시 일정한 규칙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지성知性의 힘만 가지고, 사색을 집중하고 정신활동을 부지런히 하는 것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의 방법은… 확실성의 단계를 결정하는 방법으로서, 말하자면 감각 본래의 기능을 되살리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활동은 감각활동에 뒤이어 일어나게 마련인데, 일단 정신활동이 시작되고 나면 최초의 감각활동이 닫히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정신활동이 감각을 닫아버리지 못하도록 감각 그 자체의 지각에서 출발하는 방법이야말로 정신활동에 오히려 새롭고도 확실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저 논리학이라는 학문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태를 해결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진리를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오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과 구원은 정신의 작업 전체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정신을 그냥 방치하지 말고 처음부터 끊임없이 지도해서, 마치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35쪽) (그들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기계나 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손만 가지고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전심전력으로 협동하더라도 대사업을 감당할 수 없다.
(36쪽) 그러니까 학문에는 두 개의 학파와 두 개의 구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연구자, 즉 철학자에게도 두 개의 부족과 그들의 친족이 있다고…(37쪽) 요컨대 학문을 육성하는 방법 외에 그것을 발견하는 별도의 방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즉 이미 발견된 것에 안주하거나 그들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명석판명明晳判明한 지식을 얻고자 고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의 아들이라 할 것이니, 우리는 (그들이 원한다면) 기꺼이 그들의 친구가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던 자연의 앞마당에서 배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의 내전內殿에 이르는 길을 기어이 찾아 내고야 말 것이다. …
이 글에서 제1의 방법[학문을 육성하는 방법]을 정신의 예단豫斷 anticipation이라 하고, 제2의 방법[학문을 발견하는 방법]을 자연의 해석解析interpretation이라 했다.
(38쪽) 대상을 철저히 규명한 다음… 완전한 지식을 얻고 싶거든… 경험에 의해 명백하게 드러나는 자연의 섬세함을 직접 느껴보라는 것이다. … 그렇게그렇게 하여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어떤 판단이라도 내려달라는 것이다.
1권 14
삼단논법은 명제로 구성되고, 명제는 단어로 구성되고, 단어는 개념의 기호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개념들이 모호하거나 함부로 추상된 경우, 그런 개념들을 기초로 세운 구조물은 결코 견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귀납법 歸納法 induction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1권 18
... 그러나 자연의 심오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더욱 확실하고 견고한 방법으로 사물로부터 개념과 공리를 이끌어내야 한다.
1권 19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개별자에서 출발하여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상승한 다음, 궁극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까지 도달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시도된 바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방법이다.
1권 22
...후자는 꾸준히, 그리고 올바른 순서를 따라 그 본질에까지 육박한다.... 후자는 자연에서 실제로 가장 일반적인 원칙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씩 꾸준히 올라간다.
1권 23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우상 偶像 idola과 신의 이데아 idea 사이에는, 다시 말해 황당무계한 억측과 자연에서 발견되는 피조물의 사실상의 모습 사이에는 실로 큰 차이가 있다.
1권 39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에는 네 종류가 있다. (편의상) 이름을 짓자면 첫째는 '종족 種族의 우상' (Idola Tribus)이요, 둘째는 '동굴 洞窟의 우상' (Idola Specus)이요, 셋째는 '시장 市場의 우상' (Idola Fori)이요, 넷째는 '극장 劇場의 우상' (Idola Theatri)이다.
1권 40
이러한 우상들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참된 귀납법으로 개념과 공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1권 45
인간의 지성은 그 고유한 본성으로 인해 실제로 보이는 것 이상의 질서와 동등성 同等性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계의 많은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속성이 서로 다르고, 같은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행, 대응, 관계 따위를 찾아내는데, 그런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1권 48
... 자연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그들이 발견된 모습 그대로일 뿐이지 결코 사실들의 인과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성은... 한층 '지성적인' 것을 찾아 나서, 자연계 배후에 어떤 원인이 있다는 결론을 내고야 만다.... 결국 오히려 더 가까이 있는 것, 즉 목적인 目的因 final cause에 도달하고야 만다. 이 목적인이란 것은, 우주의 본성이라기보다는 확실히 인간의 본성과 관계있는 개념으로서... 외연 外延에 속한 개체들의 원인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가장 보편적인 것의 원인을 찾으려는 것이야말로 미숙하고 경박한 철학자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다.
1권 50
... 감각은 도움을 받지 못하면 연약해서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또한 감각을 확대하거나 예민하게 할 수 있는 쓸만한 도구들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에 대한 더 나은 해석은 오직 사례에 의해, 적절하고도 타당한 실험에 의해 얻을 수 있다. 감각은 실험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고, 오직 실험만이 자연과 사물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1권 51
인간의 지성은 무엇이든 추상화시키는 본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고정분별의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자연을 그와 같이 추상화하기보다는 자연을 분해하는 편이 더 낫다.... 사물의 형상 形相 forma은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의 활동법칙을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생각이 없다면 마땅히 질료 質料 materia를 탐구해야 하며, 그 질료의 구조와 그 구조의 변화, 질료의 활동, 질료의 운동법칙 등을 탐구해야 한다.
1권 52
바로 이런 것들이 앞에서 우리가 종족의 우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우상들은 인간의 정신이 균일한 실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입관 때문에, 협소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요하기 때문에,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감각이 무력하기 때문에, 인상 印象을 받는 방식 때문에 생겨난다.
1권 53
동굴의 우상은....
1권 55
인간의 정신이 철학과 여타 학문을 대하는 태도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즉 어떤 정신은 사물의 차이점을 찾아내는 데 뛰어나고, 어떤 정신은 사물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는 점이다. 견실하고 예리한 정신은 심사숙고해서 어떤 미세한 차이도 놓치지 않는다. 한편,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정신은 희미한 것에서조차 일반적인 유사성을 찾아낸다. 그러나 양쪽 다 극단으로 빠져들기 쉽다. 전자는 사물의 미묘한 뉘앙스를 찾아내려 하고, 후자는 유사성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권 56
... 옛사람이 가르쳐준 바른 길을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당대 사람들이 제창한 혁신도 경멸하지 않는, 이른바 중용 中庸을 지키는 정신은 드물다.... 진리는 특정한 시대가 누리고 있는 불확실한 행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자연과 경험의 빛'으로 얻는 것이다.
1권 57
자연과 물체를 단순한 요소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은 지성을 약화시키는 일이지만, 반대로 자연과 물체를 복합적 형태 그대로 고찰하는 것은 지성을 우매하게 만들고 이완되게 하는 일이다....
1권 59
시장의 우상은... 이른바 언어와 명칭이 결합해 지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예리한 지성이나 독실한 관찰이 그러한 (일반인의 지성으로 구별이 가능한 선에서 사물을 정의한) 상식적인 구별을 자연에 더욱 합치하도록 바꾸려고 하는 경우에 언어는 그에 저항한다....
1권 61
극장의 우상은 (종족의 우상처럼)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의 우상처럼)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지성에 스며드는 것도 아니다. 이 우상은 여러 가지 학설로 만들어진 각본에 의해 혹은 그릇된 논증의 규칙에 의해 공공연히 주입되고, 신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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