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할 길의 지도의 몫을 하늘의 별이 해주며, 그 별빛이 길을 밝혀주는 시대란 얼마나 행복했던가
- 김윤식 교수의 회고문 중에서
......별과 별빛의 의미가 선명하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반성완 옮김
.....별의 의미보다는 창공을 보는 이에게 방점이 찍힌다. 그래서 시대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행복하다.
복되도다, 그 시대는.
창공의 별이
우리가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을
훤히 비춰주는 시대는. - ???
......맘에 든다. 참 깔끔한 번역. 시의 운율이 살아있음이다.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에 대해서.
별들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였던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 김경식 옮김
......하늘이 주체가 됨으로써 별과 별빛은 멀어졌다.다만 지도와 길은 선명해진다.
내 가슴 속을 채우고 있는 두 가지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커지는 감탄으로 더욱더 자주 머물러 숙고에 전념하게 하는,
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 루카치가 인유했다고 알려진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마지막 문장과 묘비명
나는 그 성스러운 물결에서 돌아왔고,
새로운 잎사귀로 새롭게 태아난
나무처럼 순수하게 다시 태어났으니,
별들에게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단테, [신곡-연옥편] 마지막 문장
아름다운 것, 신성한 것, 영원한 것, 종교(믿음) 그리고 사랑은 깨물고 싶은 욕망을 일깨우기 위해 요구되는 미끼다.
개념이 아니라 탈자가 냉정하게 전진하는 사상의 필연성이 아니라
덕양하는 영감이 계속되는 실체의 풍부함의 지탱과 지속적 확산이라 한다.
긴장된 거의 열광적으로 흥분된 것처럼 보이는 노고가 이러한 요구에 상응하거니와,
노고란 인간을 감성적인 것, 조야한 것, 개별적인 것의 탐색으로부터 구출하고
그들의 시선을 별들Sternen에로 향하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이 신적인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마치 벌레처럼, 먼지와 흙탕물로 순간순간을 만족하며 연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 헤겔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 소설의 이론, 루카치, 반성완 역, 심설당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그 까닭은 불이 모든 빛의 영혼이며, 또 모든 불은 빛 속에 감싸여져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해서 영혼의 모든 행위는 의미로 가득 차게 되고, 또 이러한 이원성 속에서도 원환적 성격을 띠게 된다.다시 말해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 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것이다. 영혼의 행위가 이처럼 원환적 성격을 띠는 이유는 행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은 자기자신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기 때문이고, 또 영혼의 모든 행위는 영혼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에서 독립적으로 되면서 자기자신의 중심점을 발견하고서는, 이로부터 자신의 둘레에 하나의 완결된 원을 그리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본래 “고향을 향한 향수”이자, “어디서나 자기 집에 머물고자 하는 충동”이라고 노발리스는 말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형식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학의 형식을 규정하고 또 그 내용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철학이란, 언제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균열을 말해 주는 하나의 징후이며, 또 자아와 세계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고 영혼과 행위는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말해 주는 하나의 표지이다.
행복한 시대가 아무런 철학도 갖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이러한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철학자이자 또 모든 사람이 각각의 철학이 지니는 유토피아적 목표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왜냐하면 이때에는 행복한 시대의 지도를 그리는 일 이외에 참된 철학의 과제란 달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충동이, 그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영겁의 시간 이래로 자신에게 주어진 형식, 즉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상징으로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형식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규정해 보는 일이 아니라면 선험적 좌표(transz-endentaler Ort)라는 철학의 원초적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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