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재앙과 치욕과 불명예치고
너(이스메네)와 나의 불행들 중에서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은 한 가지도 없으니 (4-6행)
너는 너 좋을대로 생각해. 그래도 나는 그 분(폴뤼네이케스)을 (땅에) 묻겠어.
그렇게 하고 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러면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하는 그분 곁에 눕게 되겠지.
경건한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그것은 내가 여기 살아있는 이들보다도
지하에 계시는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지. (71행-75행)
Nay, be what thou wilt but I will bury him
well for me to die in doing that.
I shall rest, a loved one with him whom I have loved,
sinless in my crime for I owe a longer allegiance to the dead than to the living
in that world I shall abide for ever. But if thou wilt,
be guilty of dishonouring laws which the gods have stablished in honour.
그래야만 내가 가장 기쁘게 해드려야 할 분의 마음에 들테니까. (88-89행)
내가 아무리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내게는 역시 고귀한 죽음이 남게 될 거야. (96-97행)
나처럼 수많은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찌 죽음을 이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가 이런 운명을 맞는다는 것은 나에게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아요. (463-466행)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523-524행)
나는 말로 사랑하는 친구는 사랑하지 않아. (543행)
나는 그분들 (하데와 사자)에게 현명해 보였지. (557행)
이상의 인용은 의도적으로 크레온과의 대립항은 배제하였다.
그렇게 놓고 보면, 안티고네는 "더 긴 시간"에 집착한 셈이 된다.
불행했던 현실의 건너편으로서 "기쁨"과 "명예"라는 긴 시간을,
"지하에 계시는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사랑하기 위"한 사람들과의 긴 시간을 위해
스스로의 "노고와 행동" (41행)을 같이 한 것인가?
루카치를 다시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서사시에서 범죄는 죄와 동일한 무게를 지닌 어린아이와 같은 세계이고,
비극에서 범죄는 상징일 뿐인데 반해,
소설의 범죄는 선험적 고향상실성의 객관화" (소설의 이론)라는 언명을.
안티고네의 마지막 구절
(다른 영어본에서 옮겼다. 각운이 살아있기에.)
Of happiness the chiefest part
Is a wise heart:
And to defraud the gods in aught
With peril’s fraught.
Swelling words of high-flown might
Mightily the gods do smite.
Chastisement for errors past
Wisdom brings to age at 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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