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부엉이는 어떻게 우는가?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9. 5. 28. 06:42

부엉이 바위가 보이는 봉하마을 봉수대에 올랐다.

부엉이 소리야 겨울밤에 겨우 들을 수 있는 정도겠지만,

5월의 청청한 하늘아래에서는 뻐꾸기 소리만이 마지막 봄을 아쉬워한다.

 

'새들은 모두 제 이름을 부르면 운다'는 소설 제목이 있긴 하지만,

우리말의 어법은 때때로 논리적인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새의 울음 소리로 하여 그 새를 부르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

당연히 새의 울음이 그 새를 부르는 사람들이 지은 이름에 선행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우는 양 이야기한다.

 

전임 대통령의 유서를 두고도 또 다른 오류를 범하는 신문/방송을 보면

우리의 언어교육이 도대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유서의 진위는 차치하고, 유서를 꼼꼼히 읽어 보면 알겠지만,

거칠게 이야기 하자면 그 내용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독백에 가까운)이다.

즉, 살아 남은 자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세상의 풍파를 헤쳐나온 사내가 자기 자신의 삶에게 스스로에게 던지는

마지막 정리이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다만, 마지막 한 행을 건너 뛰어 씌여진 다음 두 줄 (혹은 석 줄)의 문장만이 살아남은 자에게 하는 부탁으로 들린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따라서 '슬프하지 마라.....원망하지 마라'는 문구를

살아남은 자들에게 하는 이야기로 줏어섬겨,

부조리한 것들을 덮으려는 몇몇 신문과 방송의 논조는 정당치 않을 뿐 아니라,

어물쩍 넘어가면서 논의의 촛점을 무화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