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깨어진 유리창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산 그늘이 되는 나무 2003. 9. 21. 02:30

 

푸쉬킨의 이 싯구는 흔히 옛 이발소에 걸려 있던 문구다.

온전히 시 전체를 기억하긴 쉽지 않지만, 항상 첫 구절만으로도 나에게 남겨진 것은 많았다.

 

나는 곧잘 그 싯구의 첫머리를 중얼거리곤 하였는데, 그것은 세상이 나에게 시련으로 다가오리란 것을 진작에 알아버린 터수가 아니었다.

그 즈음에는 삶이 어떻게 나를 속일 것인가가 더욱 궁금하였으며, 나는 어찌하면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를 고민하곤 하였다.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서러워 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마음 가다듬고.

자신을 믿으라, 이제 곧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내일에 사는것

오늘 비록 비참할지라도

모든 것은 순간적이며

그것들은 한결같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이런 싯구 배경에는 흔히 '밥로스'라고 교육방송 '그림을 그립시다'에 나올 법한 풍광이 걸리거나, 퉁퉁한 돼지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그림이 나붙어 있었다.

돼지가 원래는 무지무지 깨끗한 동물인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으나,

더께가 앉아 우중충한 분위기의 그 그림은 돼지가 아니더라도 칙칙하고 추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터였다.

 

째보 아저씨는 면도날을 쓰윽쓱 가죽띠에 문질러서는 쉰내나는 노인들이나 술취한 아저씨들의 턱수염을 밀어주곤 하였는데,

나는 턱수염 깎은 자리의 그 선명함을 항상 이발소 그림과 더불어 기억한다.

그리곤 지금도 가끔은 되뇌이나니.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를 속이는 그 삶의 길이 대개 옳은 길임을 알기에.

 

진작에 나는 그리워한다. 그리움이 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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