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관악산 자락의 한 뼘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 난 산길에
누군가 보리를 심어 두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지런함으로만
한 생을 사셨던 분들이기에
저 자투리 한 뼘의 땅을
그냥 두지는 못하나 봅니다.
청보리가 어느새 희끗해진 것은
싹이 자라나서이기 보다는
아카시아 꽃잎이 진 탓입니다.
딸아이는 그것이 보리꽃인 줄로만 알아
저 또한 설명보다는
물끄러미 그 보리꽃을 쳐다 봅니다.
절로 떨어져서도
또 다른 생명의 꽃이 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이제 그 아카시아가 지고, 봄이 가고
밤꽃 내음이 밀려드는
초여름의 보리누름으로 달려갑니다.
멀리 남해 바다에서는 이맘 때 쯤이면
물오른 볼락이 펄펄 하겠지요.
저도 보리밭에서
바다를 봅니다.
가벼이 부는 바람에도
물결이 일어
흐르듯 멈추는 듯
세월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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